퇴사를 쓰게 될 줄이야(2)
스스로 결정한 퇴사가 아니라 통보받은 퇴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교수보다 먼저 퇴사 소식을 알려준 박사는 다음 날부터 나에게 일을 조금씩 덜어냈다. 고맙게도 이력서 쓸 시간까지 줬다. 운이 좋게도(?) 내가 일한 실험실에서 논문 성과가 좋다. 연구원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단독 실험이 아니기에 이 논문 저 논문에 이름이 많이 올라간다. 퇴사하기 직전까지 논문내기 위한 막바지 실험을 하느라 지난 3년 중 가장 바빴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퇴사 날짜도 더 빨리 다가오고 퇴사한다는 사실이 현실감 없다. 어제 마지막 출근을 하고 책상을 다 비웠는데도 월차 쓰는 기분이고, 여름휴가 가는 기분이다. 같이 일하는 동료 모두 같은 말을 한다. 섭섭하다거나 눈물이 난다거나 하는 감정도 잊은 채.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적응했나.
좋은 일로 나가는 상황이 아니라, 다른 팀 연구원들께 말하지 않았다. 지난주 다른 방 N 연구원께서 자기 방 연구비가 깎여서 연봉 앞자리를 깎자고 교수가 말했단다. 울분을 토하며 말을 하다가 우리 방은 어떤지 나에게 묻는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저도 말해야겠네요, 저 그만둬요. 연구비 없어서 나가요.” 했다.
선생님이 깜짝 놀랐다. 그럴 수밖에. 나도 황당하고 당황스러운데. 지금까지 일 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연구비를 못 딴 건 교수 능력이지 연구비가 깎여도 무지막지하게 깎이는 상황은 처음이니까. 오프 더 레코드, 엠바고는 끝났다. 숨길 이유는 없지만, 떠벌리고 다닐 이유도 없으니 굳이 말하지 않았다. 책상이 비워지면 자연스럽게 알았겠지만.
그만두기 전에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들었다. 우리 팀 세 명이서 밥을 한 번 먹었고, 같은 공간을 쓰는 다른 연구원들과 먹었고, 전 직장 동료들과도 먹었고. 그만하면 충분히 많이 먹었고 ‘나! 퇴사해요!’ 광고하듯 떠벌렸다. 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와!! 코로나 시국에 만나 밥 한 번 제대로 먹지 않은 사이다. 우리끼리 하는 말로 식당에서 밥이 나오기 직전까지 말하다가도 밥 먹을 땐 조용히 밥 먹는 우리 모습에,
“코로나 시국에 만나 밥 먹을 때 조용하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2주 사이 이만큼 먹었으면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그동안 좀 더 자주 먹었다면 특별한 일로 밥 먹을 것까지야. 온 동네방네 나 나간다 광고한 기분이라 조용히 나가긴 글렀다. 밥을 먹으며 나온 내가 좋아하는 무알콜 흑맥주 예찬까지. 그래! 난 흑맥주를 모두에게 나눠주며 떠나겠어! 퇴사 전 날, 치우친 취향에 들러 ‘꾸꼬’ 무알콜 흑맥주 10캔을 샀다. 거기에 와인까지.
퇴사 당일, 구입한 흑맥주에 쪽지랄 것도 없는 포스트잇을 붙였다. 딱 두 문장만 쓴 포스트잇. 2명 정도는 무알콜인 줄도 모르는데, 마셔보고 놀라지나 않으시길. 어차피 무알콜인 줄 모르면 취하는지 취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지만. 점심을 먹고 자리에 왔더니 종이봉투 6개가 든 큰 비닐이 있다. 다른 방 P 연구원이 홀케이크를 조각으로 잘라 각각 포장했단다. 이런! 사람들과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리는 나는 다른 방 연구원들과 2년쯤 되어서야 오며 가며 나누는 인사 외에 소소한 이야기를 한다. 이제야 겨우 편해진 사이가 되었는데 아쉽게도 작별이다. 언제 어디서 또 만날지 모르고, 연구비 되었다고 교수가 다시 불러 돌아갈지 모르지만 지금은 안녕이다.
나와 같이 실험을 했던 K 연구원에게도 선물을 받았다. 책과 함께하기 좋은 아로마 오일이란다. 향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편지까지 넣어줬다. 나는 쪽지가 끝인데. 둘이 손발 맞춰가며 일했다. 내가 실수하면 K 연구원이, K 연구원이 놓치고 있으면 내가. 둘이 세트처럼 일 해서 좋았는데. 동물사에서도 그랬고. 오후가 되어도 그만두는 게 진짜인지 실감 나지 않았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치우고 나왔다. 여느 날보다 짐이 조금 더 많은 퇴근길 분위기다. 내일 보자, 다음 주에 보자 같은 말을 남기며 안녕.
여담으로 말하자면, 문자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올 줄 알았는데 교수가 따로 불렀다. 퇴사 통보 한다고 불렀던 날, 다들 금방 돌아와서 놀랐다. 5분 컷이라고 할까, 할 말이 없어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뭐 때문에 부를까. 교수는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했다. 점심을 같이 먹고 싶었으나 좋은 일이 아니니 먹자는 말도 선뜻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에게 싫은 소리 하고 스트레스도 엄청 심했단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지잖아요.’ 직장을 세 번 옮기면서 쉰 날이 일주일밖에 안 된다. 이참에 나는 무조건 한 달은 푹 쉴 거라고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니 기분이 좋다. 어찌 되었건 나는 좋았다.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하니 막막함도 밀려오긴 했으나 일단 좋았다. 이번 주는 하루하루 새어가며 출근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아니었네. 괜스레 미안하다. 교수는 미안해하며 작은 선물을 줬다. 선물을 받아서라기보다 교수의 마음 씀에 미안해져 치우친 취향에서 맥주와 함께 추천받은 와인을 전달했다.
퇴근메이트는 쉬는 첫날이자 공식적인 퇴사날인 오늘(28일) 저녁 같이 먹자고 했다. 우리 집 청소년과 함께. 오랜만에 4명 조합이다. 퇴근 메이트 부부(나에겐 두 분이 전 직장 동료라는 인연이다)와 나, 청소년. 우리는 전 직장에서 출, 퇴근 카플로 가까워져 청소년까지 요가도 같이 한 사이다. 이제 우리가 함께한 퇴근길도 끝이다. 2017년부터 출퇴근을 함께 했는데, 이제 혼자 퇴근하다니. 그래도 퇴근메이트 동네는 매일 가겠지. 그 집 앞을 지나는 날도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퇴근메이트가 선물을 줬다. 만년필을 좋아하는 나에게 돌려서 여는 만년필 뚜껑인 고가의 만년필. 아끼지 말고 많이 써달란다. 그러겠노라 말했다. 준 것 보다 받은 게 많은 날들이다. 분에 넘친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최화정 배우도 라디오에서 하차했다. 주변에서 걱정되어서 안부 전화를 한단다. 그는 낮 12시 라디오 진행이라 만끽하지 못한 오전을 즐기는 요즘이 즐겁단다. 나도 그렇다. 일주일밖에 못 쉬는 상황이 되어 슬플 뿐이다. 오늘은 새 직장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집에 퍼질러 있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받을 수 없어 몇 분이 지나고 전화했다. 칠월이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