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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치욱 Oct 02. 2021

영화를 일로 만나게 되면 드는 감정

연애와 결혼의 차이와 비슷하달까

어떤 영화를 마케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당연히 해당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다. 상업영화의 경우 스펙터클이 화려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케터들은 영화를 극장에서 먼저 보고 세일즈 포인트를 잡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른 독립영화 회사들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회사에서는 보통 온라인 스크리너를 통해 마케팅할 영화를 처음 접한다.


마케팅할 영화를 보는 것은 업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업무 시간에 짬을 내서 영화를 보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영화 보는 일은 최대한 격식을 갖추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업무 시간에 영화를 보게 되면 중간중간 처리해야 할 업무 때문에 멈췄다가 다시 보기를 반복해야 한다. 그러면 집중이 안돼서 내가 무슨 영화를 본 것인지 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퇴근 후에 스크리너를 보는데 사실 이 방식도 퇴근 후 피로가 쌓인 상황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라 집중이 어렵기는 하다. 주말까지 기다렸다가 영화를 보기에는 빨리 마케팅 기획서를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여유도 없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마케팅 대상으로 만나더라도 그 영화를 보는 것은 정말 '일'이다.




마케팅할 영화를 일로서 대하는 것을 넘어 신비감까지 무너지는 것은 그 다음 과정이다. 영화의 epk(electronic press kit, 영화프로그램 등의 매체에 전달할 하이라이트 영상이나 예고편 등)나 선재물(선전 재료물, 포스터나 전단 혹은 보도스틸 등)을 제작하기 위해서 스크리너를 2배속 이상으로 돌려보면서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거나 0.25배속으로 느리게 보면서 쓸만한 스틸 컷을 건지는 작업들을 하게 된다. 관객으로 영화를 만날 때는 영화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른다. 그런데 스크리너를 통해 영화를 빠르게 혹은 느리게 보거나 필요한 장면만 다시 이동해서 보는 식으로 영화를 만나니까 그저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해부학 실습이 이런 걸까 싶어 느낌이 이상하다.


그리고 이건 다소 헛된 망상이지만 스틸 사진을 뽑아내기 위해 스크리너를 열심히 훑어도 마땅한 컷이 없다보면 감독들이 홍보마케팅도 좀 고려해서 본편에 스틸 삼을만한 숏들을 좀 넣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잠시 하게 된다. 캐릭터 스틸을 뽑아내고 싶은데 주연 말고는 다들 단독 정면 숏이 없고 화면에서 어둡게 나오거나 측면 위주로 나오면 감독이 너무나도 야속하다. 감독은 옥석을 가리듯 작품에 필요한 장면들로 영화를 구성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치만 홍보마케팅에 쓸 장면도 좀 넣어달라구요!




어쨌든 그렇게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아니 그 이상을 보다보면 나름 영화를 줄줄 꿰게 된다. 우스갯소리로 마케팅을 맡은 영화의 1타강사(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 강사, 1등 스타 강사의 줄임말)가 되는 것이다. 앞서 이러한 이유로 영화에 대한 신비감이 무너지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신비감이 없어진 자리에는 관객이었다면 느끼지 못할 친밀감이 들어선다. 러프하게 비유하자면 연애와 결혼의 차이 같은 느낌(미혼 주제에 감히 결혼을 아는 체 하고 말았네요)이라고 생각한다. 잘 갖추어진 모습의 상대방을 준비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인의 모습을 일상 안에서 거듭 마주하게 되는 차이 말이다. 아마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연애와 결혼의 차이가 벌려놓은 간극은 사랑의 깊이가 될 것이다. 영화도 그렇다. 업무를 위해 여러 번을 돌려봐서 뻔해져버린, 내가 맡은 작품들을 각별히 애정한다.


특히 마케팅 과정에서 감독의 프로덕션 노트(기획의도, 제작과정 등이 담겼다)를 읽게 되는데, 감독의 상상력과 사려 깊은 마음을 알게 되면 작품이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마케터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시 창작자의 빛나는 생각들이 관객과 소통하고 조응할 수 있도록 영화를 열심히 소개하는 것 뿐이다. 내가 맡은 영화는 흔히 하는 표현으로 자식같이 느껴지지만 그러한 감정은 창작자의 몫으로 두는 것이 맞겠다. 대신 나는 친한 친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세속적 성취를 얻기를 바라는 어떤 우정 같은 것을 느끼는 것으로 대체한다.


영화에 대한 우정과 사랑이 모호한 경계 속에 뒤섞이는 것. 이것이 영화마케팅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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