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과학 수업에서 초파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호기심 많았던 나는 초파리가 누워있는 플라스크를 비추는 현미경의 접안렌즈로 눈을 바짝 갔다댔고, 그렇게 바라본 초파리의 모습은 너무 징그러워서 아직도 그때의 감정이 생생하다.
영화마케터로 일하면서 같이 일하는 회사 혹은 건너건너 다른 회사, 다른 영화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든 보고 듣게 된다.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흥밋거리로 충분했다. 어느 배우가 어린 여자를 그렇게 밝힌다더라... 어느 감독은 자기가 영화 못 만들어놓고 마케터들한테 고래고래 화를 냈다더라... 또 어느 감독은 너무 마초적이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학을 뗀다더라...
하지만 영화계에서도 먼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일하는 곳 가까운 데의 이야기를 보거나 듣게 되면 마냥 흥밋거리로 여길 수 없게 된다. 그 이야기들의 내용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내 마음을 아프게 건드리는 지점들은 예민한 감수성의 영화를 세상에 소개하는 사람/회사의 일하는 방식이 그들의 영화를 닮아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강렬한 의문을 품었더랬다. 그들의 모순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를 않아서. 한탄하는 시간도 많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모순적인 지점이 있기 마련이다. 나 또한 그렇고. 물론 이런 식으로 퉁치는 것은 무척이나 투박하다. 하지만 나도 주어진 일을 해야 했기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계속 의문을 품고 바라보며 대할 수는 없었다. 또한 그들의 사정을 내가 자초지종 알 수는 없기에 섣부른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내가 속한 이곳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어나는 모순들 때문에 괴롭기도 했지만 사실 좋은 영화를 닮은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모순을 행하는 사람들에게서도 그 모순들 외의 선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사람은 무릇 입체적이라는 고루한 말과도 같이). 무엇보다 내가 소개하는 영화 자체를 바라보는 것에서 오는 직업적 보람이 무척 컸다. 그것에 비하면 내가 목격한 모순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영화계에서, 특히 다양성영화계에서 이런 감정의 타협을 해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씁쓸하게 했다. 심지어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내 기대만큼 선하지 않다는 것, 그러면 나는 대체 얼마나 고상하고 대단한 성인군자이길래 이런 의문을 품느냐는 것(너 뭐 돼?), 영화계도 결국 단선적인 사회생활의 구동원리에 의해 돌아간다는 것. 어른이 되면 얻게 되는 썩 달갑지 않은 감정과 교훈을 이곳에서도 예외없이 느끼게 됐다.
그러니, 좋아하는 분야를 계속 좋아하려면 그 속내를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마시라. 만약 뭔가를 보거나 들었다면 지나가는 바람에 휙 하고 날려버리길.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로 조금은 안심하시길.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 모순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로 남아 그들을 좋아하는 분야에서 영영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나는 불쾌함을 조금 느끼고 동시에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