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 나는 꾸준히 준비했던 공기업 취업 시장에서 시원하게 물 먹고 하반기 시즌아웃을 받아들인다. 수많은 공기업의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마음에도 없는 지원동기와 입사포부를 쓰는 데 지친 나는 마음 한켠에 묻어둔 영화비즈니스로 눈을 돌린다. 이전 글에 그 과정을 보다 자세히 기술했다. 이번 글에서는 행정학 전공자가 뜬금없이 영화 산업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느꼈던 외로움을 말하려고 한다.
영화 산업에는 어떤 직무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부터 내게는 맨 땅에 헤딩하는 일이었다. 나는 영화라는 제품의 유통 경로 속에서 오로지 최종단계, 소비자로서만 지내왔다.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까지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그리고 주변에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거나 준비중인 사람이 전무했기 때문에 도움을 구할 길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대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취업 정보 커뮤니티를 뒤져보지만 영화계 취업은 마이너한 영역인 모양인지 쭉쩡이같은 정보들만 건지기 일쑤였다.
결국 원초적인 방법을 택했다. 당신이 새로운 정보를 찾고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진리의 구글링. 영화 비즈니스와 관련된 온갖 키워드로 정보를 샅샅히 뒤졌고, 그 결과 영화 산업에 어떤 직무가 있으며 각각의 직무를 준비하기 위한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아주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요즘은 유튜브도 좋은 정보의 창구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홍보마케팅 직무가 현실적으로 다른 직무에 비해 인력의 수요가 많아 취직의 문턱이 비교적 낮다는 정도의 파악을 하게 되었다. 영화 전공자도 아니고 영화 관련 활동이나 경력이 전무한 나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쨌든 홍보마케팅 직무에 진입하기 위해 거의 면허증처럼 이수해야 하는 사설 기관의 실무교육과정을 고민 없이 신청했고 겨울에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주변에 온통 공무원이니 전문직이니 수험생활을 하는 친구들 뿐이어서 영화계 취직에 대한 정보를 구하거나 적어도 함께 같은 길을 나아가며 힘을 북돋워줄 친구가 전무했던 나는 홍보마케팅 수업을 같이 듣는 분들과 친해져서 나름의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코로나19가 심해져 수업은 비대면과 대면을 오가며 진행되었고, 사실 코로나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내 성격이 워낙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탓에 수강생 분들과 친분을 쌓지 못한 채 4주 간의 짧은 수업이 종료되었다.
홍보마케팅 실무교육의 매 수업을 무척 열심히 들으면서 흥미와 열정이 마구 샘솟았다. 그리고 은은히 감도는 설레는 마음 속에 영화 산업에서 내가 활약할 앞날을 섣불리 상상해보곤 했다. 하지만 예정된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나자 수강생들과는 건조한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고, 모든 것이 뚝 끊긴 듯 다시 아무 준비가 되지 않은 백수만이 홀로 남았다. 영화마케팅이라니 내가 헛된 생각을 한 건가. 얌전히 공기업 준비를 더 보강해서 정돈된 취업전선에 뛰어드는게 맞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원래 하던 취업준비로 돌아왔지만 이미 영화마케팅의 맛을 본 이후라 공기업 준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같은 수업을 듣던 분으로부터 영화계 취업준비 스터디를 구한다는 연락을 받았고, 망설임없이 초대에 응했다. 함께 스터디를 했던 분들 덕분에 그나마 영화계 취업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외로움이 조금 줄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올해 초에 내가 느꼈던 외로움과 불안감은 쉬이 해소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과 달리 영화계의 채용 공고는 상반기나 하반기 등의 시즌을 타지 않고 그냥 그 회사에서 사람이 필요하면 수시로 뽑는 식이다. 즉 취준생 입장에서는 하염없이 공고가 뜨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간간히 올라오는 채용 공고를 보고 나름대로 성실히, 창의성 넘치게 자기소개서를 써서 제출해도 불합격했다고 통보조차 오지 않았다. 공기업과 영화계 두 곳 모두에서 취업하지 못하고 영영 헤매다가 청년기를 흘려보내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엄습하는 공포를 잊기 위해 낮에는 영화를 봤고 밤에는 술을 마셨다. 찬장에 싸구려 와인이나 위스키를 쟁여놓고 매일같이 홀짝홀짝 마셔대지 않으면 잠을 못 이뤘다. 답답한 마음 하소연할 데는 커녕 간단한 소통을 주고 받을 곳도 없어서 영화계 취업한 분들이 업로드한 유튜브 영상을 정주행하면서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고 댓글까지 달곤 했다(외로움이 사람을 이렇게 질척이게 한다).
그시기 우연히 영화계 취업 준비생이 모인 카페가 개설된 것을 발견하고 가입해서 나름대로 정보를 주고받으려 했다. 그러나 좁은 영화계에서 함부로 면접이나 합격 후기를 공유하다가는 신상이 특정될 것을 다들 우려했는지 커뮤니티는 활발하지 못했고 얼마 안 가서 카페가 폐쇄댔다. 범사가 결국 그렇겠지만 영화계 취업도 나 홀로 돌파해야 하는 일이겠구나 싶어서 마음을 다잡고 자소서를 가다듬고 영화 관련 대외활동을 소박하게 준비했다. 그 결과 슬슬 서류 합격률이 높아지고 취업까지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취업을 한 뒤에도 비전공 영화마케터로서 느끼는 외로움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 영화계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 박봉에 워라밸도 낮은 이 분야에서 버텨내는 것이 맞는 길일까. 내가 연극영화과나 언론/미디어 학과를 나왔다면 이쪽 분야에 대해 이야기 나눌 친구나 가까운 지인이 그래도 한두 명쯤은 있었을텐데. 지금도 이런 고민이 떠오를때면 혼자 끙끙 앓으면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는 것 같다. 영화마케터들은 결국 영화판에서 질릴대로 질려 떠나곤 한다던데,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구해줄 선배들은 남아있지 않은걸까. 그래도 버티고 버텨 오랜 경력을 쌓은 영화마케터들의 신입 시절에 느꼈던 감정들도 나와 비슷했을까. 묻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여전히 답을 구할 곳이 없기에 여기에나마 방백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