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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daum Jul 26. 2022

1. 전업주부 3년 차 어느 날

11월  한통의 전화

두 달 뒤면 내 나이 앞자리가 3에서 4바뀐다.

살면서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 아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40대가 코앞이다.

이런.. 젠장  학창 시절 40대는 완전 꼰대. 불통. 아줌마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연령대였다.

하, 나도 늙는구나.


벌떡 일어나 뭔가를 계획하고 바쁘게 살아도 부족할 판국에 이불속의  아늑함은 꽤 달콤한 유혹이다.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지금 당장 코앞에 일부터 실행하자.

"현서야! 현우야! 일어나야지! 7시 20분이다~"

뭉그적뭉그적 아이들이 일어난다.

고양이 세수를 마친 둘째 녀석 뒷덜미를 다시 잡고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마무리시킨다.


 올해로 2학년 아들 현우,  5학년 딸 현서, 옷가지를 챙겨주고 조미김에 흰쌀밥을 싸서  먹인  후, 등교를 시킨다.

필수 장착한  인자한 엄마 미소를 띠며,

"잘 갔다 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꾸벅 인사하며 걸어가는 아이들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나의 하루도 시작이다.


제법 쌀쌀한 11월 아침,

우선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아.. 시원하다! 아이스크림 한 덩이 집어삼킨 상쾌하고 차가운 아침이다! '


' 아 차! 시간을 제일 많이 잡아먹는 세탁일부터 해치워야지.

이놈의 빨래는 매일 해도 왜 또 쌓여있지?' 

속으로 중얼거린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빨래를 분류하고 세탁기 속으로 거칠게 집어던진다.


다행히 전날 저녁 설거지를 해놓고 자서 주방은 깨끗하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며 나름의

상쾌함을 잠시 느낀다. 

캡슐 커피를 내려놓고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집안 가득 커피 향이 스며있다.


'역시.. 일어나는 게 힘들지 움직이고 나면 개운하다니까'


그때 위층에서 드르륵~ 창문여는 소리가 나면서 밤새 덮었을법한 이불을 연달아 털어 재낀다.


'이런  젠장..  여보세요. 아래층에 먼지 들어온다고요.

제발 이불 좀 그만 털어요!'

속으로 말을 삼키고 감정 섞인 손동작으로 '쾅' 우리 집 창문을 닫아 먼지를 차단한다.


매일 틀에 박힌  루틴 속에서 꼭 빠졌으면 하는 위층 이불 터는 행위는  상쾌한 내 기분을 순식간에 집어삼킨다.

아.. 단독주택에 대한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기분을 정돈하고 젖은 머리칼을 말린다.

동네 외출이지만, 살포시 입술에 생기도 불어넣어 준다.


내린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다.

목줄을 잡고 산책하려면 장갑도 필수다.

엄마 바라기 "초코" 목줄을 채우고 을 나선다.


일주일 전에도 어제도 오늘도 매일 같은 아침이다.

시원한, 조금은 코 시린 겨울 오전.

초코는 연신 코 박고 동네를 누빈다.

'후훗 녀석.. 저리도 좋을까'

나는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한껏 여유를 부려본다.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 버스를 향해 뛰는 젊은 엄마들을 보며 '저때가 좋을 때지'

 어른들 말을 흉내 내어보기도 한다.

걷다가 몸에 한기가 들면 언 몸을 녹여주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셔준다.

역시 추울 때 마셔야 제맛이다.

동네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와  세탁이 완료된 세탁물을 꺼내어 털어 널어놓는다. 섬유유연제 냄새가 제법 향기롭다.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돌려보니  오전 11시.


좋았어.  집안일 모두 마쳤고, 초코 산책도 마쳤고, 현우가 오기까지 약 3시간 남짓 남았다.

이제 집중하자.  이제 진짜  나만의 시간이다.


책상에 앉아 스케치북을 꺼낸다.

버 카스텔 48색 수채색연필을 준비하고 자주 사용해서 몽땅해진 색연필을 고쳐 잡는다.

어제 그리다가 멈춘 그림을 이어서 그린다. 쓱쓱쓱

최근 빠져있는 보태니컬 아트이다.

하루 일과 중에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힐링할 수 있는 시간!

약 한 시간 목 빠져라 집중을 하던 그 순간, 핸드폰 벨이 울렸다.

누군가 보니 동네 맘 카페지기  친한 동생이었다.

"어 선희야~ 웬일이야~  "

선희는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나의 안부를 묻는다.

"혜진 언니! 나야~ 요즘 뭐해?

"뭐.. 매일 똑같지. 그림 그리고 애들 챙기고"

"언니! 요즘 뭐 하는 거 없으면 교육 들어라. 교육 듣고  책 선물도 받고~  거기다  요즘 교육 트렌드 신박하던데 들어봐~바뀐 교육과정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곳이 출판사잖아"

"무슨 책 선물? 아니지.. 무슨 교육?"

나의 질문에 선희는 내가 말을 끊을세라 따발총 쏘듯 설명한다.

"언니 다른 게 아니고~  나도 들은 교육인데 ○○출판사 알지? 거기서 정규 교육 며칠 받고 요즘  최신 교육 트렌드도 배우고.. 언니 애들 책도 많이 읽히잖아. 책 좋아하니까 한번 들어봐!"

책 선물에 솔깃했지만 그래도 공짜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 신중을 기하며 재차 물었다.

"그 교육받으면 일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그거 영업 아니니? 난 영업은 안 한다  책은 솔직히 당기지만.. 왠지 교육 듣고 나면 일하라고 할 것 같아"

나는 1차 거절을 했다.


사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슬슬 집에 있는 것 자체에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지 약 1년 정도 되어간다.

핑계 대기로 최고인 초등 1학년 입학자녀가 있다는 카드도 2학년 들어가니 낯 뜨거워 써먹지 못하게 된 지 일 년..


동갑내기 남편도 딱히 나가서 돈을 벌어오라고 간 큰 얘기도 안 하고 있지만 나 스스로도 뭔가를 해야겠다! 결심조차 안 서던 시기였다.

전업주부로 눌러앉은 지 딱 3년 만에 나태함과 무기력증이 잠식한 것이다.


그런 나에게 책 선물과 요즘 트렌드 교육법이라는 소리는 꽤 솔깃했지만 무거워진 엉덩이를 일으키기엔 1% 부족했다.


1% 때문에 갈등하는 내 마음이 전화기 너머로 전달이 되었을까?

선희는 최근 내가 쏟아낸 말을 기억하고 반문한다.

"일단 일주일 투자해서 들어보고  판단해. 아니다 싶으면 그때 말하면 되는 거야 ~ 그리고 언니. 예전에 애들 교육비 정도는 벌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언니 어린이집 선생님이었잖아~  분명 잘 맞을걸~  아니지 아니야! 일단 그냥 들어봐~듣고 판단해 "


흠.. 숨차게 쏟아내는 선희의 말을 듣고 있으니 손해 나는 것 없어 보였다.

첫째. 책 선물을 준다

둘째. 무슨 교육이든 배워서 나쁠 것은 없다

셋째. 일주일 투자해서 신박한 교육방법을 배운다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잇는다.

"선희야 일단 무슨 말인지 알겠어. 생각해보고 연락할게. 애들 아빠에게도 물어보고~"  

대화의 마무리를 서둘러 맺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 통화를 하느라 그림 그리던 손은 멈춰져 있었다.

눈앞에 완성되어가던 해바라기 그림이 눈에 다시 들어온다.

무의식적으로 말없이 손을 움직여 색깔을 더한다.

돈이 들어온다는 해바라기 그림.

집에 걸어놓으면 진짜 돈이 들어올까? 뭐라도 믿고 싶은 마음에 손을 움직이고 머릿속은 더 빠르게  회전한다.


'까짓 거  그래. 인생에서 일주일 새로운 공부해보는 건데 뭐 교육 듣자! 아님 말지 뭐~  인생 직진이야. 내가 누구야  도전하는 혜진이 아니냐고 ~'


혼자서 정리를 마친다.


그날, 한가롭고 어느 때와 똑같은 11월 정오,

한통의 전화통화로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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