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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속에서 길을 찾다

by RUKUNDO

나만의 속도로 답을 찾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주변의 온갖 닦달에도 고집스러운 침묵을 지키며 의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가야 할 길을 정하지 못한 답답함이 늘 마음 한 켠에 자리했다. 그 답답함이 차지하는 공간이 커질수록 밤은 길어졌다. 덜 자란 어른에게 밤이 깊어질수록 두려움 커져만 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굳게 다짐했던 결심마저 자꾸 흔들리고 있었다.


달이 유난히 크고 바람이 쌀쌀하던 날이었다. 집 앞 놀이터에 혼자 앉아 한참 청승을 떨다 고등학교 동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지치지도 않고 군인이 되겠다던 체대생이었다. 가고 싶은 길을 알지만 방황하는 이와, 가고 싶은 길조차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의 만남이었다. 집 근처 포장마차에 앉아 소주를 한 병 시켰다. 이런저런 푸념들이 안주가 되어 술잔이 자꾸 비워졌고, 자연스럽게 자리는 길어졌다.

“우리 KOICA 지원하자. 해외 봉사활동 가자.”
그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시간을 함께 가져보자는, 소신 가득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는 헌신 같은 소리 한다며 핀잔을 주었다. 취한 것 같다고 웃어넘기며, 흐트러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같이 봉사활동을 가자던 그녀는 갑자기 쿵후를 배우겠다며 중국 유학을 떠났다. 그녀도 떠났고, 한참 전에 술기운도 가셨는데 이상하게도 ‘해외봉사’라는 단어만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거창한 마음도 없었고,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뜨거운 열정도 없었다.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겠다는 애국심은커녕, 이력서에 한 줄을 추가하고 싶은 욕심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이 경험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 내 침묵을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밤마다 끝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과 싸우는 것보다 효율적인 일 같았다.


그제야 KOICA가 무엇인지 검색해 보았다. ‘한국국제협력단’이라는 이름과, 해외봉사단을 주기적으로 모집해 파견하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기심에 홈페이지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공지사항에 떠 있던 해외봉사단 모집 공고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내가 살면서 처음 마주한 세상이 내게 건네는 진지한 제안이었다. 대학도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를 골라 지원했을 만큼, 평생 ‘모집공고’라는 것에 무심했던 나였다. 그런데 그날, 그 글은 이상하게도 나를 붙잡았다. 물리치료, 지역 협력, 컴퓨터 교육, 체육 교육 등 모집 분야는 다양했다. ‘봉사정신이 투철한 자’라는 지원 자격을 보고 잠시 주춤했지만, 애써 고개를 돌렸다. 이유 없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결과가 어떻든, 그냥 해보자. 나는 그렇게 지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경력란에 졸업한 고등학교와 재학 중인 대학교를 겨우 적어 넣었다. 형식도 구성도 엉망진창이었지만, 그 종이 한 장에 담긴 내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내 인생 첫 이력서였다.


지원서를 제출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도서관에서 밀린 과제를 꾸역꾸역 하고 있었다. 낯선 번호로 문자가 한통 도착했다. 1차 합격과 2차 면접에 대한 안내였다. 놀라고 기쁜 마음에 도서관에서 소리를 질러버렸다. 나의 간절함이 통한 것인지, 순수한 열정이 돋보였던 것인지 모르겠다. 대학교 4학년씩이나 돼서도 면접용 정장 한 벌이 없었다. 면접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어떤 것을 공부해 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대한 어른스럽고 깔끔한 옷을 찾아 입고 늦지 않게 면접장에 가는 것뿐이었다.


면접 대기실은 한눈에 봐도 준비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잘 차려입은 정장을 입고, 예상 질문지를 정리하며 마지막 준비에 한창이었다. 나는 빈자리에 앉아 수험표를 달고 멀뚱히 차례를 기다렸다. 내 차례가 되어 면접이 시작됐다. 다섯 명의 면접관들이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아는 것은 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뒤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무슨 일이든 빠르게 익히고,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면접용 모범 답안 같지만 진심이었다. 아는 것은 없었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건지, 젊은이의 패기였는지 모르겠다. 내 대답은 과하게 솔직하고 간결했다.


면접장을 나오자, 바깥에 서 있던 안내요원이 다가와 희망 파견지를 적어달라고 말했다. 부루마블게임에서 봤던 몇몇 낯익은 국가이름이 있었지만, 대부분 이름조차 생소한 곳이었다. 국가 옆에는 각 파견요청기관의 지원 조건이 적혀있었다. 첫 해외경험이니 가까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남아국가로 추정되는 나라 중 지원조건과 부합하는 곳을 찾았다. 신기하게도 조건에 맞는 곳들이 모두 같은 나라였다. 1~3 지망까지 같은 국가를 적어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문자를 받았다. 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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