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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윤슬에 비춰

르완다이야기 13

by RUKUNDO

허무했다.


르완다에 온 지 꽤 되었지만, 돌아보면 해낸 일이 없었다.

하루하루는 비슷하게 흘러갔지만 이상하게도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먹고 자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서 아주 사소한 일에도 쉽게 만족했고, 덕분에 자주 웃었다.

하늘은 늘 예뻤고, 지난주에 담근 양배추김치는 잘 익어 맛있었고,

현지어와 영어는 늘지 않았지만 눈치코치 능력만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어느새 사람들과의 대화가 가능해졌고, 이곳에 어느 정도 적응한 내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매일이 즐겁고 보람찼지만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내가 이곳에 왜 왔는지, 그 목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껴버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혼자서는 모든 게 벅차서.

고산병이 심하게 와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아직 현지적응 훈련 중이니까.


내 안에서 오만가지 변명을 만들어내며 스스로와 타협했다.

나는 유학생으로 온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이 새삼 부끄러웠다.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 일도 없이 이런 생각이 든 것이면 좋았겠지만, 계기가 있었다.


르완다에는 코이카 단원들 외에도 다양한 NGO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염소은행, 재봉틀 학교, 버섯 농장 등, 각자의 방식으로 지역 사회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현지인들과 가까이 일하는 단체들의 활동을 견학하는 날이었다.


우리 기수는 모두 학교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나는 컴퓨터 단원, 동기는 체육 단원이었지만 결국 모두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찾아갈 곳은 NGO 중 하나인 ‘굿네이버스’의 활동 지역이었다.

그들이 지원한 예산으로 운영되는 학교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조금 긴장됐다.

현지에 살고는 있지만, 지금까지는 이동 반경이 정해져 있어 일종의 보호막 안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보호막을 벗어나 진짜 현지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현지 사람들과 더 가까이, 직접 활동하게 된다는 생각에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되고, 사실은 겁도 조금 났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지나 학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단체에서 준비한 지원물품을 꺼내는 순간,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우리를 향해 환영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놀라웠다.

아프리카식 북 하나가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 위에 아이들의 박수 소리, 발 구르는 소리가 더해지며 리듬은 점점 풍성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래는, 어떤 밴드의 음악보다도 흥겨웠다.

점점 그들의 춤은 '환영'이라는 목적을 넘어선 흥겨운 축제가 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잊은 듯했고, 그 흥은 어느새 우리에게도 번져 모두가 함께 리듬을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 느끼던 긴장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도 나도 흥에 겨워 놀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예정보다 길었던 환영 순서가 끝나고, 현지 선생님과 NGO 봉사자가 우리를 차례로 소개했다.

우리도 짧게 배운 현지어로 인사를 건넸다.


이어지는 활동은 공책과 공, 그리고 가장 중요한 회충약을 나누는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기생충 감염이 흔하고, 그것이 큰 병으로 이어지기 쉽다고 했다.

그래서 회충약은 단순한 약이 아니라, 많은 질병을 예방하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새로 맡게 된 역할이 신이 났다.

그리고 새로 만난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마냥 좋았다.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다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투명한 눈동자.

비유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맑았다.

별것 아닌 일을 하면서도, 왠지 모를 뿌듯함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후 선생님이 학교를 안내해 주었다.

한국의 학교와 비교하자면, 열악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전등은 아예 보이지 않았고, 칠판과 나무로 만든 조악한 책상 앞에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수업을 받고 있었다.

파란색과 노란색 교복을 입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신발조차 없는 아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빛과 표정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투명한 눈동자는 마치 윤슬처럼 빛났고, 나는 그 눈빛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우리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스스럼없이 다가와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이 모든 열악한 환경을 덮고도 남을 만큼의 희망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열악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린 내가 더 무례하고

'열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 느껴졌다.

어쩌면, 진짜 열악한 것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아, 내가 가게 될 곳도 이런 곳이겠구나.

나는 환경만 보고 놀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양 행동했다.

적응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의 목적을 흐리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지금이라도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다시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루빨리 파견지로 가고 싶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나도 그들처럼 흥에 겨워 반짝이며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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