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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낸 자리에 스며든 이해

르완다이야기 12

by RUKUNDO

향수병이 도진 것 같았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동기들을 졸라 한국 라면을 끓여 먹었다. 몇 주 만에 맛본 고향의 맛은 훌륭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이 있었다. 라면에 반드시 같이 있어야 하는 그것이 없었다. 철이 덜든 것인지 그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김치를 찾는 나는 아직 어린것이 틀림없다. 라면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을 찾는 모습을 보며 내가 이렇게 식탐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었다.


국내 훈련을 받을 때 김치 담그기 수업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대략적인 방법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한 후, 동기 중 누구도 김치를 담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없었다.

아마 모두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밥을 해 먹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 김치를 담근다는 일이 이곳에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김치와 한국 음식은 그리웠지만, 한국에서도 이미 번거로운 일이었으니 이곳에서는 더더욱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현지식에 적응하는 것이 더 쉽고 편한 길이었다.

김치 없이 밥을 못 먹고, 입맛 까다롭기로는 우리 집 최고를 자랑하던 나였지만, 잊고 포기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살면 살아지는 것이 삶이었다.


르완다에 온 이후, 당황하는 것 다음으로 많이 한 것은 체념이었다.

한인식당이 없는 이곳에서, 괴식이긴 하지만 우리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다음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느린 인터넷이었다. 한국에서 인터넷 전화를 개통해 가져왔지만, 그 전화조차 연결되지 않을 정도의 인터넷 환경이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네이버나 다음 같은 한국 포털 사이트는 접속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강제로 구글 계정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나마 구글이라도 접속되어 한국 사람들과 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이민 가방에 짐을 꽉 채워 왔지만, 막상 살다 보니 부족하고 아쉬운 것들이 많았다. 사소한 것으로는 지우개부터, 큰 것으로는 편한 책상 의자까지 다양했다.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이 적응의 한 영역임을 배워 나가는 중이었다.


사실 조금 쉬고 싶었다.

체념과 적응을 반복하다 보니, 오늘은 유독 쉬고 싶어졌다.

조용한 침대에 누워 재방송으로 꽉 채워진 TV를 틀어 놓고 멍 때리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이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침대도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혼자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이것조차 적응의 한 부분인가.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내고 살았던 건가. 한국에서 나의 삶은 천국 같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오늘도 하나를 더 배웠다. 이렇게 배우고 또 배우고 익히다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득도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말인데, 이른 아침부터 숙소가 북적거렸다.

주말이니까 그래도 좀 조용할 줄 알았는데, 웬걸. 역대급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북적북적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이뤄지는 귀신같은 환경이다.

어제 행정원이 선배 단원이 와서 김치와 한국 음식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일정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상상 이상이었다. 한두 명 올 줄 알았는데, 많은 인원이 몰려왔다. 르완다에 있는 모든 청년들이 다 몰려온 것 같은 기분이다. 모든 단원들이 다 온 것은 아니겠지... 설마.

정말 우당탕탕, 르완다의 하루하루는 심심할 틈이 없다.


이 모든 소란 끝에 장을 보러 나섰다.

그래도 행정원이 차를 보내줘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모토기사를 부르느라 혼을 쏙 뺏겼을 것이다.

선배 단원들과 시장에 가는 길이었다. 숙소의 큰 철문을 나서서 먼저 현지 시장으로 향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키갈리에서 가장 큰 현지 시장, 키미롱고 시장이었다. 선배 단원이 앞장서서 길을 찾고, 물건을 골랐다. 이곳에서는 양배추, 마늘, 생강, 파 같은 파릇한 생명이 담긴 것들을 샀다.

능숙하게 물건을 고르고 흥정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그들의 머리 뒤로 후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다음에 향한 곳은 내가 좋아하는 나쿠마트였다.

나쿠마트는 그래도 몇 번 와 봤던 곳이라, 키미롱고 시장에서 선배들의 기세에 눌려 쪼그라들었던 어깨가 조금 펴지는 것 같았다. 마트 앞 코끼리 상이 괜히 반가웠다.

이곳에서 여러 양념을 샀다. 피시소스, 파프리카 가루, 인도산 고춧가루, 밀가루, 고기까지 구입했다. 키미롱고 시장에서 산 것과 비교하면 생명을 조금은 잃은, 붉은색의 물건들을 잔뜩 손에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선배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바비큐를 준비하기 위해 마당 준비팀, 본격 김치 만드는 팀, 수육과 그 외 음식을 준비하는 팀으로 나뉘었다. 나는 어느 그룹에도 끼지 못하고 뻘쭘하게 이곳저곳을 서성였다.

일사불란하게 물 흐르듯 움직이는 사람들이 낯설고 신기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인데, 어쩜 저렇게 능숙할 수 있는지…


양철통으로 만든 화로에 숯을 가득 채우고 고기를 굽는다.

익숙하게 양념을 하고 맛드러지게 음식을 해내는 그들이 참 멋있었다. 무엇이든 뚝딱 해내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저런 모습이 될 때까지 저들도 나처럼 혼란과 혼돈의 시간이 있었을까?

배우라는 김치는 배우지도 않고 하루 종일 입을 벌리고 감탄만 하는 내가 낯설다. 이렇게 감탄을 잘하는 사람인지도, 배울 것이 많은 부족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 와중에 진하게 풍기는 고향의 냄새에 배가 고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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