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퇴사

by RUKUNDO


조용한 퇴사 (Quiet Quitting)
일은 하되, 마음은 그만둔 상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업무에 열정을 쏟지 않는 상태.
정해진 업무 외에는 하지 않으며, 퇴근 후에는 연락을 받지 않고, 주말이나 야근도 거부함.
회사에 몸은 있지만 마음은 떠난, 일종의 심리적 퇴사 상태.


며칠전부터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싫지 않다.

퇴근을 하러 사무실 문을 나오는 동시에 업무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퇴근하면서 남은 업무에 대한 생각과 내일있을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한 가득 안고 문을 나왔었다.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날도 많았고, 출근길은 해야할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회사빌런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마음이 늘 무거웠다. 신입사원때는 타고가는 버스가 이대로 넘어져서 회사에 가지 않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던 나에게 불현듯 찾아온 변화가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다.


회사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것은 나다.

지난 몇 년간 걸리지 않던 독감에 걸려 몇주를 된통 아팠다. 회사도 해야할 일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감기에 몰입해서 앓았다. 최근에 이렇게 아픈적이 있었나 싶다. 아침에 일어나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고, 약을 먹기위해 억지로 무언가 입에 넣고, 약을 먹고 잠에 드는 생활이 이어졌다. 어지간하면 회사에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내가 급작스럽게 자리를 비우면 주변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니 말이다. 이번에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몸을 가눌수가 없었다. 마음이 불편할 겨를도 없이 ‘쉼’이 강압적으로 찾아왔다.


겨우 몸을 가눌정도가 되자마자 회사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고작 감기때문에 이렇게 힘들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고작 감기때문에 길게 자리를 비우는 것이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업무는 쌓여있었고, 회사의 시계는 돌아가고 있었다. 밀린 업무들을 정리하고 해결하고 나니 알 수 없는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입안이 씁쓸해 지더니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이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출근과 퇴근이 이어졌다. 이상한 일이벌어졌다. 내 것이 아닌 업무가 넘어오고 흘러넘쳐도 마음이 잔잔했다. 불합리한 상사의 업무지시가 내려와도 반박하고싶지 않았다. 회사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다. 無의 상태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한없이 잔잔하고 평온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나는 발버둥치기를 멈추기로 결정했다.

잠잠하기를 선택하기로 했다. 결과에 대해 조금 무책임해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조용한 퇴사구나.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신입사원시절, 늘 표정없이 자리를 지키는 과장님들이 신기했다.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잠잠하고 아무리 봐도 이상한 업무지시에도 ‘네’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그사람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절대 저런 선배가 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런 선배들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려나 보다.


조금 변명을 하자면 나는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으며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나의 노력은 의미있는 것이 아니었고,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주변에 시큰둥하게 앉아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선배들을 보며

마음대로 판단하고 맘대로 다짐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그들에게도 열정넘치던 시절이 분명있었을 것이며,

그들의 불씨가 사라지게 만든 수없이 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천천히 시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이제야 조금 공감할수 있을 것 같다.


감히 말하건데 나는 후회없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 열기로 남은 시간을 버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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