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을 처음으로 적어 내려간 그 날은 꽤나 화창했다. 후임들은 모두 침대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기에 생활관 전등은 꺼져 있었지만 책상에 햇빛이 약간 들어와서 책을 읽기에는 부족함 없는 조건이었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노트를 먼저 펴서 아무 생각이나 글을 써보자고 연필을 들었다. 입대하기 전의 나는 내 취향의 철학이나 가치관도 없었고 주관도 없었다. 지금은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모든 문제가 어려웠지만 약간의 주관이 생겼다는 사실은 뿌듯했다. 내친김에 나만의 철학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관용구를 고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관용구를 반대로 꼬고 싶었다. 그게 멋있으니까. 반전은 아무래도 내 철학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맛이 있을 터였다. 2분 정도 고민했다.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갑자기 ‘인생은 마라톤이다’는 말이 떠올랐다. 살면서 종종 들어온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뭔가 속에서 배배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옳다구나 싶었다. ‘정말 인생이 마라톤이라고? 나는 아무튼 반대할 거야!’ 내 주특기인 반항심이 또 튀어 올랐다. 나는 말을 거꾸로 돌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라는 나의 철학을 고안했다. 단지 문장만 떠올렸을 뿐인데 순간적으로 박수가 절로 나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 경험을 비추어 보았을 때 진정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먼저, 마라톤은 결승선이 있지만 인생은 결승선이 없다. 인생을 구성하는 순간들, 예를 들면 대입, 취업, 프로젝트, 사업, 그 외에 다양한 목표들은 결승선이 맞다. 그래서 인생에도 결승선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결승선은 자기 자신이 정해놓은 가짜에 불과하고 그 어디에도 결승선은 없다. 심지어 저 다양한 목표도 그렇다. 내가 결승선이라고 믿고 도착한 길에는 언제나 새로운 출발선이 있기 마련이다.
난 살면서 종종 마라톤처럼 달려서 목표에 도착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주변에서 나를 위로하며 ‘빨리 달리지 말고 체력 안배해라.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고 마라톤이니까.’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막상 힘든 마라톤을 마치고 도착한 결승선 뒤에는 그다음 길이 놓여 있었다. 그것만큼 힘이 빠지는 경험이 없었다.
내가 생각한 결승선은 사실 결승선이 아닐지도 모른다. ‘결승선’이라고 생각한 대학에 도착했을 때 이곳이 ‘나의 결승선’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 앞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뒤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주저앉은 시간이 2년이었다. 그때는 결승선이라고 쓰여 있는 체크 포인트에 도착했을 때 사무치듯 허망했다. 마치 ‘여기까지만 오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는 판넬에 도착했는데 사실 나와 똑같이 속은 누군가가 써놓은 낙서였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느낌이랄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결승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승선이라고 굳게 믿는 곳에 도착할수록 뒤에 찾아오는 우울감과 허망함은 커진다. 인생에 결승선은 없다. 체크포인트만 있을 뿐이다.
두 번째, 마라톤은 길이 정해져 있다. 마라톤 선수 중 누구도 ‘길이 어디지?’ 하고 헷갈릴 일은 없다. 하지만 인생은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 잠시만,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아무 길이나 가도 좋다는 말인가?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에서 봉착에 빠졌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시작한 철학의 한계를 마주한 것일까. 만약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그냥 남이 정해준 길을 가도 문제없지 않은가. 이 질문들에 대해 나는 여러 날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몇 개월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광고가 있었다. 광고에서 모든 선수가 정해진 길을 가다가 한 선수가 질문을 던진다. 누가 결정한 결승선인가? 그리고 그는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좋다는 결론은 내린다. 하지만 나는 이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다. 어디로 향해도 좋다고? 그럼 달리다가 절벽에 떨어져도 좋다는 이야기인가? 그리고 가장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든 생각은 ‘만약 내 나름대로 길을 선택해서 달렸는데 나중에서야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면? 내가 가고 싶은 방향대로 아무렇게나 가면 그게 정말 책임감 있는 행동일까? 그리고 아무 길이나 가도 좋다고 말하는 게 정말 책임감 있는 조언일까?’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인생이 마라톤이 아니라고 마냥 아무 길이나 달리는 게 아니다. 인생은 내 길을 찾는 싸움이다. 인생이 마라톤이 아니라는 말은 길을 직접 골라서 아무 길이나 가도 좋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길을 발견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 곳이나 가도 무작정 좋다는 뜻이 아니다. 처음에 아무 곳이나 가는 이유는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함이다. 처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동서남북 어디를 보더라도 다 걸을 수 있어 보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무 곳이나 갈 수 있지만 길을 걸을수록 내 길을 찾게 된다. 그때 방향을 틀어 나의 길이라고 믿는 길로 가야 한다. 지나온 길이 틀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더 나다운 길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나답지 않은 길이 틀린 길은 아니니까. 마라톤은 길을 찾는 과정이 아니지만 인생은 분명 길을 찾는 과정을 무시할 수 없다.
결승선이 없다고 믿어도 목적지를 설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방향은 알아야 하니까. 하지만 어느 방향이 맞는 건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처음에는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당연하다. 나는 지금까지 무슨 길을 달려왔는가. 대학만을 위해 달려왔다. 취업만을 위해 달려왔다. 목적지는 이미 누군가가 정해줬다. 목적지를 스스로 정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방향을 고르는 게 세상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나는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답을 내려 목적지를 설정하고 달려야 한다. 판단력은 걷다 보면 생길 테니 일단은 가야 했다. 그 목적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도착하고서야 알았다면? 그때 가서 과감하게 방향을 틀면 된다. 목적지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생각한 바를 고민하고 또 고민해봤다. 나는 이 모든 생각을 종합한 결과 도착지가 어디인지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착지가 어디인지 너무 깊게 생각하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목적지는 언제나 잘못될 수 있고 구체적으로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결승선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지도 못한 결과물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오히려 내가 계획한 대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더 불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가봐야 안다. 결승선에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가 있을지, 그다음 목적지를 위한 안내판이 있을지, 지금까지 길을 잘못 들었으니 방향을 틀어보라는 소중한 단서가 있을지, 허허벌판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길을 달려왔다는 사실,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달려왔다는 사실, 그리고 달려오면서 내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일단 내가 가는 곳이 어딘지 깊게 고민하지 말고 가야 한다. 인생은 마라톤과 다르게 길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목적지 역시 계속 바뀔 수 있다. 미리 정해두고 시작하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에는 암묵적으로 지금 하는 일의 결승선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포함되어있다. 이 생각이 아주 강력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우유부단해진다.
자라면서 열심히 살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나도 열심히 살라는 조언을 들으면서 부단히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열심히 사는 것도 아니라는 몇몇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인생이 마라톤이 아니라면 속도가 중요할까. 만약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정해진 결승선까지 누가 더 빨리 가느냐 싸움이기 때문에 속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인생이 마라톤이 아니라면 속도는 각자 나름이다. 빨리 달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고 항상 에너지를 남겨두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물론 자본주의 압력이 빨리 달려야만 도태되지 않게 만드는 경향은 있지만 그걸 감안하고 생각했을 때 ‘그래서 얼마나 빨리 달릴 것이냐’에 대해서는 분명 자신만의 ‘본성’이 있다. 자신만의 길이 있는 것처럼 자신만의 속도가 있다.
나는 어느 정도 속도가 나에게 맞을지 고민해봤다. 열심히도 달려봤고 누워서 달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나는 열심히 달린 당시에는 그 속도가 너무 고약했고, 누워서 쉬고 있을 때는 그 시기가 나름 고통스러우면서도 달콤했다. 하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열심히 달린 그 당시가 나름대로 내 직성에 맞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사명을 이루고 나의 길을 찾기 위해 열심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느 정도 방향을 잡으면 속도를 좀 내야 속이 뚫리는 성격이었다. 나만의 속도가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속도를 오랜 시간 경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의 길이라 믿는 길이 생기고 나의 사명이라고 믿는 사명,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나 목적이 생겼을 때는 그때는 방향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속도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그 속도는 각자가 맞는 속도를 찾아야 한다. 만약 40살까지 느린 속도로 살아온 사람이 40이 되어서야 인생에 대한 책임감,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지금까지 난 왜 이렇게 느린 속도로 살아왔는가하고 후회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그러니 인생을 시작하는 시점에 여러 속도를 경험해보고 사색해보아야 한다. 나에게 맞는 속도를 감 잡을 때까지.
속도는 길과 마찬가지로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변해야 한다. 물론 나에게 맞는 속도는 있지만 항상 내 맘에 맞는 속도로만 달릴 수는 없다. 천천히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가끔은 빨리 달려야 할 필요가 있고, 빨리 달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가끔은 천천히 걸어야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 속도 역시 상황과 맥락을 따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열심히 산다’는 말은 절대 ‘빠르게 달린다’는 말과 같지 않다. 열심과 속도는 동의어가 아니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라는 철학의 쓸모는 실로 놀라웠다. 첫째, 누군가가 ‘너는 왜 그렇게 사냐’고 물어도 초연해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길이 있고 나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꾸준히 묻는 자들은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사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변절자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철학이 나에게 초연함을 주었기 때문에 감정적인 대꾸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애초에 나를 진심으로 지지해 주는 사람들은 나에게 왜 그렇게 사냐고 묻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 인생의 일부가 되어 준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뿐이다. 반대로 왜 그렇게 사냐고 묻지 않는다고 내가 맞는 길을 가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잘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지구에 그 누구도 없다. 언제나 잠정적 결론이다.
둘째, 조급함이 많이 줄어들었다. 각자의 길이 있을 뿐이니까. 또 과정이 곧 인생이니까. 답을 고치고 고치다가 끝나는 인생인데 조급해할 필요가 있을까?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나보다 빨리 달리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배가 아프고 속이 뒤틀리고 질투심으로 몸을 겨누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나름 괜찮았다.
물론 이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길을 걷는다고 생각해도 가끔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착각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인생을 다시 미시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나에게 경쟁자가 있고 내가 추구하는 길을 멋들어지게 사는 사람이 종종 보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떵떵거리며 살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면으로 들어가 다시 두 목소리 모두에게 커피 한잔 내려주고 대화를 나눴다. 그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셋째, 불공평을 인정했다.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말의 의미를 각자 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자원의 차이가 있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나는 나막신을 신고 내 길을 찾고 있는데 내 친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자신의 길을 찾아다니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말은 분명 틀린 말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다만 그 전제가 같은 길을 걸어가는데 불공평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저 길을 찾는 과정의 수월함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왕이면 걸을 때 딱딱한 나막신보다 편안한 러닝화가 좋으니까.
마지막으로 외롭지 않다. 마라톤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돕고 주변 사람들과 같이 뛰는 게 좋다. 나는 길을 걸어가다가 꽃을 보는 순간이 좋고, 같이 뛰어가는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순간들이 좋다. 내가 본 꽃을 자랑하고 내가 맛본 음식을 남들에게도 소개해주고 싶다. 나만 행복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남들과 함께 행복할 때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이 항상 기뻤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나 스스로 내 길을 발견한 적이 없었다.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나를 발견하고 행복을 발견하고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혼자 걸었다면 절대 불가능했다.
나는 나의 철학을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로 정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