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은 없다

by 보로미의 김정훈

1년 반의 추락을 멈추고 싶었지만 도저히 이 추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언젠가 기막힌 사건이 생겨서 이 추락이 끝났으면 했다. 지금은 추락하고 있지만 10년 뒤의 나는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에 인생에 손을 놓고 있었다. 무책임한 일상이었다.


나는 어떤 누군가가, 영화가, 영상이 내가 뭘 해야 할지 알려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것만 안다면 나는 추락이 끝날 거라고 기대했다. 난 그저 그런 인간이었다. 누군가가 뭘 해야 할지 알려줘야만 구제받는 줄 아는 그런 인간이었다. 요행을 바랐다. 무언가 시도하면 곧바로 나에게 어떤 신호가 오길 바랐다. 조금만 해봐도 ‘이 일이 나의 일이구나’ 싶었으면 했다. 지금까지의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 했지만 새로운 길이 도대체 어떤 길인지 몰랐다. 하루라도 빨리 그 길을 알고 싶었다. 내 기대와는 달리 1년 반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그 길은 보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찾지 못하니 사실 나는 어떠한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구제 불능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내가 얻은 깨달음이나 지혜를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느렸다. 절대 곧바로 깨달은 지혜가 없었다. 오히려 빨리 찾으려 할수록 더 늦어졌다. 나는 지름길을 찾으려고 잔머리를 굴렸지만 오히려 내 꾀에 내가 당했다. 항상 욕심을 부릴수록 더 늦어졌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질문을 던지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찾는 길에 장애물만 만드는 꼴이다. 명확한 이해는 없고 얄팍한 믿음만 남기 때문이다.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찾고 싶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대답을 종종 내려 놓아봐야 한다.


나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다. 첫 직장은 아무래도 성공적으로 들어가야지 싶었다. 처음 가지는 직업이 나의 천직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오히려 시간을 더 지체하게 만들었다. 사실 성공적인 취업보다 시급한 문제는 ‘난 어디에 취업해야 하지?’였다.

어디에 취업해야 할지 모를 때는 대답만 내리려 하지 말자. 일단 궤도에서 내리고 관성을 정지시켜라. 앞으로 나아갈 생각만 하지 말고 가끔은 멈춰라. 그리고 자신이 묻는 질문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지름길이 있지만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조급했을지도 모르겠다. 더 시기심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비밀을 소수만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 외롭고 고독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꿈을 찾아서 멋지게 꿈을 이뤄나가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데 지금 인생은 따분하다고 주변에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사람마다 꽃 피는 시기가 다르다’고 조언했다. 나는 사람마다 꽃 피는 시기가 다르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꽃을 피우지 못하고 시드는 꽃봉오리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꽃 피는 시기가 찾아온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햇빛을 받지 못하고, 물을 받지 못하고 죽는 꽃봉오리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나는 눈으로 봤다. 꽃이 되지 못하고 죽는 꽃봉오리는 세상에 널리고 깔렸다. 사람마다 꽃 피는 시기가 다른 게 아니라 꽃을 피우지 못할 수도 있다. 꽃을 피우지 못하고 죽는 식물도 있다. 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많이 속상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 의지의 영역을 벗어난다면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꽃을 아무리 피우려고 애써도 태풍이 불어서 날아가면 끝이다. 꽃 피는 시기가 있다고 해서 그 시기가 찾아온다는 말은 아니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고 했던가. 그래, 마라톤은 날씨가 안 좋으면 취소라도 해주겠지. 인생엔 그런 게 없더랬다.


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죽는 꽃봉오리라고 할지라도 나는 굴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결말은 모르지만 나는 결말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만약 꽃봉오리라면 내가 꽃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꽃이 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사람마다 꽃 피는 시기가 다르다’는 말은 틀렸다. 대신 꽃을 피우지 못하더라도 꽃을 피우는 노력과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그저 새싹을 피우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충만한 의미가 남는다. 꽃봉오리는 꽃이 되었을 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기대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순간에 머물러 있는다.


만약 사람이 정말 꽃 피는 시기가 다르고 언젠가 꽃이 핀다면 나는 지금부터 손을 놓고 꽃이 필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하리라. 어차피 꽃 피는 시기가 분명하게 있다면 말이다. 만약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다가 우연치 않게 정말 꽃이 폈다면 그 꽃은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꽃일 것이다.


나는 깨달음을 얻거나 어떤 일의 감을 잡는 데 항상 오랜 시간이 걸렸다. 뭐든 느렸고 내 모든 경험에 있어서 지름길은 없었다. 내 모든 경험들은 투박하고 느리고 무의미해 보이는 개별적인 부품들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품들이 모여서 자전거가 되어있었다. 부품 하나하나만 보았을 때 쓸모없어 보였던 것들이 어느새 쉽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자전거가 되어있었다. 나는 지혜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타고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로 달려본다. 지름길은 없지만 자전거는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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