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년 연말이 돌아올 때마다 ‘이번 한 해에 내가 뭘 했지’ 떠올려보곤 한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으면 자괴감이 들어서 ‘사람들은 나이 먹기 싫어하면서 1월 1일 12시에는 뭐가 그렇게들 신날까’라고 괜히 투정을 부리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23살의 겨울,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이번 한 해는 무얼 했나 떠올려보았다.
막상 1년을 천천히 돌아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다. 내 20대 초반의 연말은 항상 죄책감이 들었다. 얻은 게 없다는 느낌, 취업에 도움 되는 일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를 하지 않은 날이 헛되이 보낸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다면 성인이 되고 나서는 모든 시간 헛되이 보낸 시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무언가 얻었다는 증표나 결과물은 없어도 내 삶의 지혜는 조금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들었다. 당장은 남들에게 보여줄 결과물은 없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는 달라졌다고 느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찾는 과정에서 나는 내 경험을 돌아보고 경험을 곱씹어보면서 지혜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를 이해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저 친구가 왜 저러나, 저 사람은 왜 저러나’ 싶은 일들이 많았는데 많은 일을 겪고 ‘내가 왜 이러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때마다 놀랍게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나를 이해한 만큼 다른 사람들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20살부터 거의 3년에 걸쳐 하나의 질문을 던져왔다. 바로 ‘자리가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라는 문제였다. 가끔 사람들이 어떤 자리에 가게 되면 달라지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어떤 새로운 자리에 갈 때마다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자리가 문제인지 사람이 문제인지 항상 궁금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가서 모르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이질감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튀어나올 때마다 도저히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에 빠지고 말았다. 나 스스로를 컨트롤하지 못하니까 금방 실수가 튀어 나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나는 자리가 문제인지, 아니면 내가 문제인지 알고 싶었다.
3년이 지나 나는 자리가 문제라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여 ‘자리가 나를 드러낸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내 안에는 상상 이상의 수많은 캐릭터가 있다. 다만 평소에는 눈치를 채지 못할 뿐이다. 상황에 맞는 캐릭터가 튀어나와 모습을 보인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나 자리,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모르는 캐릭터가 갑자기 튀어나온다.
나는 질투 같은 건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질투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도 상황에 따라 질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질투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안에도 질투하는 캐릭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만 질투라는 감정을 처음 겪었고 간접 경험으로도 진지하게 접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왜 이러지?’라는 생각만 하며 답답해할 뿐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일은 바로 내 모습을 찾고 이름표 붙여놓기다. 다양한 상황을 접할수록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럴 때마다 내가 왜 그런 생각과 감정, 행동을 느꼈는지 곱씹어보아야 한다. 만약 대답을 찾기 어렵다면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으면 많은 도움을 얻는다. 작가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듯이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성격이 분명 있을 터이다. 다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다면 나 스스로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이 튀어나올 때마다 당황하듯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당황할 것이다. 따라서 나의 다양한 모습부터 알아가자는 생각으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누구나 추한 시기가 있음을
내가 20대 초반에 겪은 경험들을 떠올리면 ‘추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옹졸하고 찌질할 뿐만 아니라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 어른인 척만 하며 지냈다. 내일이 없는 듯 놀기 바빴고 부모님에게 미안하지도 않은지 등록금 아까운지 모르고 지냈다. 그렇게 추했다.
누구나 추한 시기가 있다. 예전에는 나 스스로가 추한지는 모르면서 추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일단 속으로 득달같이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나를 돌아보고 나서는 아주 조그마한 관용의 자세가 생겼다. ‘그럴 수 있지’라며 말이다. 추한 생각이나 행동을 그 사람과 동일시하지 않게 되었다.
혹시나 추하다고 느끼는 사람을 마주한다면 한 번쯤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그 사람의 행동과 생각은 그 사람과 다를 수 있다. 추한 행동과 행동을 한 사람을 동일하게 여기지 말아보자는 지혜는 추한 시기를 경험해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관용의 지혜다.
나는 현자가 아니기에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여간 정신 차리기 어려운 대접을 받으면 화가 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을 나중에라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남을 이해하고 남의 말과 행동이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고 믿으면 자연스럽게 관용의 자세가 생긴다.
공감의 재료가 필요하다
과거를 돌아보면 경험만 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곱씹어보아야 생산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나에 대한 이해도 그랬다. 어떤 일을 겪고 나면 머리가 뒤죽박죽 꼬인다. 친구들에게 어떤 일을 설명하려고 하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하여튼 그랬어’라고 말하는데, 이는 머리에서 아직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말 그대로 경험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때 책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경험한 지혜를 아주 깔끔하게 표현한 책을 보면 곧바로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됐다. 그 이후로는 일기도 쓰면서 나의 경험을 스스로 곱씹어보려고 노력했다.
완벽히 똑같은 경험이란 없다. 같이 놀이공원에 놀러 가도 누구는 재밌다고 좋아라 해도 다른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재밌어하는 친구는 지루해하는 친구도 나와 같은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최소한 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는 있다. 내가 만약 상대방의 상황이라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공감 능력을 가져보고자 시도해보았었다. 단순해 보이고 쉬워 보였지만 막상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물론 습관이 들여지지 않았을 때는 아예 공감하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공감하려고 해도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의 재료가 없으면 오히려 분노로 바뀌었다.
공감을 위해서는 경험의 재료가 필요했다. 나를 이해하는 재료가 쌓이는 만큼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정말 쓸모없어 보이는 경험도 나중에는 살면서 마주치는 단 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
한마디 말씀으로 평생토록 행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코로나-19가 세상을 발칵 흔들어 놓기 전에 입대한 나는 복학하자마자 큰 혼란이 왔다. ‘비대면 수업’이라니! 이게 정말 가당키나 한 방식인가? 난 예전부터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때마다 졸았는데 큰일이었다. 복학하고 나서 이제는 정말 제대로 공부해보자 다짐했는데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학기는 시작되었고 논어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내 마음에 쏙 드는 구절이 있었다.
“한 마디 말씀으로 평생토록 행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서’이리라.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바라지 마라.
제자가 공자에게 평생토록 행할만한 것을 한마디 말씀으로 표현한다면 무엇이 있느냐 묻자 공자가 ‘서’라고 대답했다. ‘서’는 ‘공감에 기반한 이해와 배려’다. ‘서’는 항상 ‘충’과 세트를 이루는데, 충은 진심을 다한다는 의미다. 즉, 자신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진심을 다해 충만하게 경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해 ‘서’를 발휘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나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공자의 말대로 우리가 평생토록 행할만한 것은 열심히 직간접적 경험을 겪어서 남에게 공감하고 세상에 공감하여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방법은 충만한 경험이 아닐까. 충만한 경험을 한다면 우리는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공감의 재료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지혜대로 공감하는 사람은 행동할 줄 안다. 우리가 기억하는 세상의 수많은 위인들은 남에게 공감하고 무언가를 선물해준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불편함을 공감하고 해소해주기 위해 행동한 사람들이다.
스타트업에 잠시 관심을 가졌을 때 나는 이들이 어떻게 창업을 시작했는지 궁금했었다. 공통점이 있었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성공한 기업들은 모두 누군가가 느끼고 있는 불편함에 진심으로 공감해서 만들어진 기업이었다. 세상에 대한 불만을 충만하게 경험하고 그것을 타파할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표출할 방법을 찾다가 시작한 창업이었다. 그들은 모두 충만하게 경험하고 공감하여 행동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내가 무엇에 공감할 수 있으며 어떤 것을 공감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처음에 아무 생각도 없을 때는 공감할 재료도 없다. 어떤 충만한 경험도 해보지 못했다면 어떠한 공감의 실마리도 없다.
나는 충만하게 경험하고 얻어낸 공감이 생겼기 때문에 그것을 표출하기 위한 행동이 필요했다. 나의 경험과 공감이 곧 내가 왜 앞으로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사실은 표출하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기보다 공감을 절실히 하다 보니 행동이 저절로 튀어나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만을 줄 수 있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공감의 재료만큼 상대방에 공감할 수 있다. 여전히 어리기 때문에 경험도 부족하고 공감의 재료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우리는 항상 ‘지금 무엇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는가. 무엇에 진심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