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1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책을 2년만 일찍 알았더라면.' 세상과 아등바등 싸우고 치열하게 사색한 끝에 얻어낸 깨달음이 우연히 읽게 된 책에 한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을 때 그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을 조금만 더 일찍 읽었더라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통탄스러움이죠.
하지만 한번 더 생각해서, 제가 만약 2년 전에 그 문장을 읽었다면 과연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직전에 말했듯이 제가 20살에 읽은 문장 중에 '꿈은 없어도 된다'가 있습니다. 저는 그때 이 문장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저 뻔한 위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죠. 에세이니까 불쌍한 20대 청년들에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괜히 입에 발린 말을 했으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꿈은 없어도 괜찮다.'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이 바뀐 이유는 그간 읽은 책에게 설득당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두꺼운 오해의 벽이 지난한 독서로 천천히 금이 가더니 결국은 부서진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책이 저를 설득했다기보다, 제가 저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책은 설득의 재료를 줬을 뿐이고요.
저는 남을 설득하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를 설득하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아는 저이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돕고자 할 때 항상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어떻게 그런 불안과 공허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과거를 돌아보면 어떤 대단한 계기는 없었습니다. '아! 그런 거였구나, 그런 거였어!' 같은 순간은 없었던 거죠. 대신 길고 긴 설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통 제가 설득당한 문장들은 어떤 강력한 주장을 담은 문장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가 나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무기를 주는 문장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2020년엔 이런 구절을 만났습니다.
"자동차 뒤꽁무니를 쫓아서 맹렬하게 달리는 개가 있다고 해보자. 갖은 노력 끝에 마침내 그 개가 자동차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고 치자. 자, 그러면 이제 그 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렇다. 그 개는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른다. '그 후의 계획'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 <타이탄의 도구들> 中
저는 이 문장을 읽자마자 그 개가 바로 저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대학이라는 자동차 뒤꽁무니를 맹렬하게 쫓아 달린 개였죠. 저는 원하는 자동차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12월, 백록담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결과가 발표되었으니 확인하라는 문자가 왔습니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We are the champion>과 학교 정문 사진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엔 정말 뛸 듯이 기뻤습니다. 아니, 실제로 제자리를 수십 번 뛰었습니다.
막상 대학교에 들어가니, 그동안 합격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잘 풀리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만 해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던진 질문은 당연하게도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까?"였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이 정말 야속한 점은, 마치 출구 없는 미로를 걷는 듯, 쫓을 자동차가 없는데 달려야만 하는 개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찾던 '무엇'은 정말로 뭐였을까요? 이번에도 '나'를 빼닮은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이지 내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나에게' 진실인 어떤 진실을 찾는 문제, 즉 '내가 인생을 바쳐서 기꺼이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어떤 사상'을 찾는 문제이다. …... 아프리카의 사막이 물을 애타게 그리듯이 내 영혼이 목말라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키에르케고르 / <두 번째 산> 中
물론 사상을 찾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저는 나에게 진실인 어떤 진실, 내가 인생을 바쳐서 기꺼이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찾다가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군대에 갈 시기가 되었죠. 저는 결국 군대에 갈 때까지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군생활이 마냥 '인생을 낭비하는 시기'라고만 생각하고 입대했는데, 신기하게도 살아오면서 이때만큼 충만했던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제게 많은 배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은 미뤄두고, 지금껏 돌봐주지 못한 나 자신에게 집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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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정말 무심하리만치 단순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건 당연하다.'
1. 입시는 다른 말로 가능성 넓히기 게임이다.
데일카네기의 <자기관리론> 서문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시버리David Seabury가 『성공적으로 걱정하는 방법How to Worry Successfully』에서 “책벌레에게 발레를 시켰을 때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경험의 압박을 대비하지 못한 상태로 성인이 된다”라고 했는데, 그의 말에 공감이 간다.
여러분은 이 문장이 어떻게 읽히시나요? 저는 제가 읽혔습니다. '그래, 내가 20살까지 한 거라곤 입시밖에 없는데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알겠어. 그뿐만이 아니야.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경험한 모든 압박에 전혀 대처할 수 없는 20년을 살아왔어. 그래서 그저 '그럴 수 있지'하고 넘길 수 있는 문제에 너무 힘들어했어.'
입시는 제가 정의하길, '가능성 넓히기 게임'입니다. 훗날 어떤 진로를 선택하게 될지 모르니 일단 가능성을 최대한 넓혀 놓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죠. 문제는 모든 학생들이 가능성을 넓히는 데에만 익숙하기 때문에, 성인이 되자마자 '이제 가능성을 좁히고 달려 나가세요'라고 아무리 재촉해 봤자,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뭐랄까. '가능성을 좁히는 과정'은 무시하고, '달려 나가는 모습'만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사실 정말로 성숙한 사람은 무작정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찾고 가능성을 좁히는 사람인 거 같은데 말이죠. 아직 달리고 있지 않는 학생들을 보면 응원하기는커녕, 이젠 달려야지 않겠냐고 재촉하기 바쁩니다.
2. 탈피하다
보통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옵니다. 내가 원래 걷고 있던 길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어떤 계기나 혹은 그저 길을 걸어가다가 이건 진짜 내가 아니야라는 깨달음이 찾아오는 거죠.
그들이 진짜 자아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오랫동안 속해 있었던 세계와 관련된 정체성으로 치장된 가짜 자아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그 모든 허물을 벗겨봤더니 그 속은 텅 비어 있었고, 허구로 구축된 가짜 자아는 즉시 허물어졌다. - <전념> 中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언가가 나랑 맞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확신할 줄 압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해선 도저히 확신하지 못합니다. 예전부터 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이 그것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다가 '나 이제 자유를 찾아 떠날래!'라고 선언하는 경우엔, 사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애초에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내 진짜 자아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을 뿐입니다.
즉,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일과 삶에 대한 의문과 회의감만 남아 있고 다음 스텝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라는 뜻이죠. 그러니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런 회의감에서 비롯된 질문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겁내고 금방 떨쳐버리려고 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3.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애초에 경험이 없는 대학생은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3~60대 성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이 있기에 지금까지의 경험과 자기 이해를 토대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쉬운 예시로 넷플릭스가 있습니다. 넷플릭스를 처음 보는 사람은 무엇을 봐야 할지 막막합니다. 여러 번 시도를 해봐야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는지 감이 오죠. 반대로 이미 넷플릭스를 오래전부터 봐왔던 사람은 'No' 리스트가 있습니다. No 리스트가 많을수록 무엇을 Yes 해야 할지 비교적 쉽습니다.
대학생은 흰 도화지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대학생들이 자신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 같아요. 자신들은 이미 뭘 해야 할지가 명확해야 하며, 그것을 해야만 한다고 채찍질합니다. 왜냐하면 주변 모두가, 내가 동경하는 사람은 뭘 해야 할지 알고 있으니까! 마라톤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두가 달리기 바쁜데 나 혼자만 지도를 찾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나중에서야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실 모두가 길을 모른다는 사실을요.
어른들은 속 편하게 말하면 됩니다. '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학생이 이 사실을 정말 모르고 있을까요? 사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 더 빨리 알고 싶다는 조급함, 그것을 알기 전까지의 불안함이 힘들 뿐이죠. 이쯤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멘탈을 부여잡을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4.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소비자 경험은 떨어진다.
청바지를 사러 백화점에 갔는데, 청바지 매장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한 매장은 바지 종류가 2개뿐이고 또 다른 매장은 6종류의 청바지가 있습니다. 어느 매장이 더 만족스러울 거 같나요?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6개의 선택지를 가진 매장이 더 만족도가 높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6개가 아니고 100개라면? 100개가 아니고 1000개라면?
사람들은 선택지가 많아지면 만족도가 그만큼 높아질 거라 생각하지만, 소비자학에 따르면 시장의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소비자의 만족도는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고르지 못한 선택지에 더 좋은 게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메뉴가 하나밖에 없는 식당과 메뉴가 100개인 식당을 생각해 보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메뉴가 하나뿐이면 소비자에게 선택권은 없습니다. 이제 남은 건 요리사가 얼마나 맛있는 요리를 주느냐겠죠. 하지만 메뉴가 100개인 식당은 애초에 고르는 데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게다가 만약 음식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소비자들은 재밌게도 요리사를 탓하기보다 자신이 메뉴를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딘가에 더 좋은 메뉴가 있을 거란 생각과 함께, 만족도는 더욱 낮아집니다.
선택지가 너무 많으니 고르다 지쳐버립니다. 이것도 만족도가 낮아지는 아주 큰 원인 중 하나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택의 역설을 말한 베리 슈워츠는 '어항'을 이야기합니다. 물고기는 어항에 있을 때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항을 깨면 모든 것이 가능할 거라고 믿지만, 사실 어항을 깨면 자유를 얻는 게 아니라 마비가 됩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은 자신만의 수조를 가져야 한다고 슈워츠는 조언합니다. 결국 또 가능성을 좁히라는 말이죠.
슈워츠의 조언은 우리에게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이 듭니다. 자신만의 수조를 생각하고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만족감을 느끼며 살고 있을 텐데요. 저는 누구보다 그런 수조를 가지길 원했던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수조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원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래서 그 수조가 무엇이냐는 거였죠. 다시 키에르케고르의 오아시스네요.
5. 뭘 해봐야 뭘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이건 마치 딜레마처럼 들립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무언가를 해봐야 뭘 할지 알 수 있다니. 사실 이건... 가짜 딜레마입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사회의 잘못된 속삭임이 부른 가짜 딜레마죠. 과거를 돌이켜보면 저는 무언가를 할 체력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죠. 다만 확신이 없었을 뿐입니다. '이 길로 가는 게 맞나?'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면 사회는 또다시 말합니다.
'Just Do it!'
하지만 저는 도저히 그냥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안전한 바닥에서 고민만 하기 바빴죠. 그러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무언가 하라'는 말은 소용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에 나쁩니다.
진실은 간단합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뭘 해야 할지 모르면,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하고, 계속 찾아다녀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저도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땐 무언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평가와 판단을 하고 있다. 이들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우유부단한 '상태'를 먼저 바꿔야 한다. 상태가 바뀌면 무언가를 할 수 있으리라"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의 오류가 섞여 있습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에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면 좋은 것은 맞지만, '바꿔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들의 현 상태에서 거의 미션 임파서블과 같습니다. 톰 크루즈나 해결 가능한 미션들인 거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비로소 나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내 초라한 현실과 고민, 내 진실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할 일을 찾고 생각과 고민을 잊는 방식으로 도피합니다. 저는 한때 술을 마시면서 도피했습니다. 유튜브를 보면서 도피했습니다. 나중엔 책을 읽고, 운동하고,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면서 도피했습니다. 심지어 쉬면서도 도피했습니다. 저는 더 나은 성장을 하기 위함이라는 명분 하에 '열심히' 쉬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했죠'.
또 우리는 이상향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무서워합니다. 만약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가 지금껏 배워온 방식과 다른 삶을 살기에 불안하고,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는 기간이 그만큼 늦춰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향 그리고 배워온 방식은 말 그대로 과거의 이상향입니다. 과거의 방식입니다. 어쩌면 사회가 주입한 이상향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No'!라고 말하는 바로 그 과거죠.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고 묻기 시작한 사람은, 과거를 끊어낼 줄 알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자신이 잘못 믿어온 신념과 이상향으로 치장된 가짜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자신이 과거를 끊어내야 하는 시기에 왔음을 알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콕' 하고 짚어주어야 하는 것이고요.
"그야 그렇죠. 하지만 알다시피 살다 보면 한쪽 문은 닫혔는데 다른 쪽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인간관계나 직장, 집, 사는 동네 등이 예전만 못하죠. 어떤 일을 다 마무리했는데 다음 일이 도무지 생기지 않는 겁니다. 문득 굉장히 불확실한 상황에 부닥친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그럴 땐 도대체 어디에 기대야 하죠? 음… 그럴 때 내적인 믿음이 있다면 유용하지 않을까요?”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中
우리는 통로에 있습니다. 저는 다음 문을 억지로 여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 다음 문이 자연스레 열리기까지 통로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통로가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 알려주려고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면,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그 당연한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불확실한 상황이라는 파도를 서핑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 기술이란 우리가 마주한 이 상황에 대한 이해 그리고 우리가 겪고 있는 감정과 생각이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이해입니다. 그런 이해가 있다면 내적인 믿음은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는 믿음은, 그런 진정한 이해에서 생기죠. 앞으로 그것을 설명해 볼까 합니다.
책을 너무나 좋아하는 저이기에, 앞으로도 수많은 책과 제 생각이 등장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강력한 주장을 담은 글을 써왔습니다. '넌 이렇게 해야 돼'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저는 제가 그런 문장으로 설득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습니다. 저는 내 정신의 방을 열어주는 열쇠 같은 문장을 얻고, 제가 저 스스로를 설득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에게도 자기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열쇠를 주고 싶을 따름입니다. 어쩌면 저 스스로에게도 제가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만 같습니다. 모쪼록 좋은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