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묻지 마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3

by 보로미의 김정훈

어느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의 삶은 결국 산화 과정 내지 연소 과정일 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흥분한 목소리로 선생님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물은 사람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사로잡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로고테라피'라는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치료법을 창안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통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심리치료 분야에서 나름의 체계를 개발한 사람들은 자신의 병력을 서술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병력이 시대의 집단적인 노이로제 증세를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의 병을 그리고 고통을 기꺼이 고백하고 희생함으로써 타인들이 그 병에 대한 면역력을 기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노이로제를 앓는 사람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입니다.

- <빅터프랭클>, 빅터 프랭클 中



여러분 주변을 잘 살펴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욕을 쓰면 건강에 해롭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나무라는 사람들,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잔소리하는 사람들. 사실 그들만큼 인생의 어느 시기에 욕을 많이 하고, 인생을 낭비해본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아프게 했는지 알기에 다른 이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리도 강력히 주장하는 거겠죠. 빅터 프랭클도 그렇다고 합니다. 이건 어쩌면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남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말이죠.



"하지만 로고테라피와 관련되는 한 나는 젊은이로서 삶의 명백한 무의미함에 대한 좌절과 같은 지옥을 직접 경험했으며, 허무에 대항하는 면역체를 만들어내기 전까지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허무주의를 경험했다는 것을 진심으로 고백한다. 그래서 나는 로고테라피를 창안했다.

- <빅터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 빅터 프랭클 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삶의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합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물었던 질문보다 더 처절하고 간절하게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또다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 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 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은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다.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을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Et lux in tenebris lucet.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붙은 땅을 파면서 서 있었다. 감시병이 지나가면서 욕했고, 나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로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파놓은 흙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그는 수용소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침묵의 대화를 나누었고, 삶의 의미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이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의 정신적 자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첫 번째 책의 원고를 빼앗겼을 때 그런 의문은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강제수용소에 들어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곳에서 내 첫 번째 책의 원고를 빼앗겼을 때 이런 일시적인 고난을 직접 경험했다. 나중에 나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나는 내 인생이 과연 무엇이었나 물었다. 나를 계속해서 살아남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식도 없었다. 심지어는 영적인 자식이라 할 수 있는 원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티푸스 열로 벌벌 떨면서 몇 시간 동안 내 절망과 씨름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나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의미가 내 원고가 출판되고 안 되고에 좌우될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그것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의미이며, 시련을 겪는 것이나 죽는다고 해서 그 의미가 손상되지 않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삶이 정말로 의미가 있다면 자신이 하고자 했던 바를 이루지 않아도, 원고가 출판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다른 말로, 원고를 출판하면서 얻는 삶의 의미는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겪은 시련의 의미와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아무리 자신이 원고를 출판하지 못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며 절대적인 의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수용소에서 경험으로 배운 것을 토대로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프랭클

표지는 또 어찌나 예쁜지.





애써 삶의 의미가 뭔지 묻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걸 의식 조차 하지 않을 때였죠. 지금 생각하면 참 속 편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걸 묻게 되더니 그 전의 삶으론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전엔 한 번도 궁금한 적도 없었고 의식한 적도 없는 그 질문이, 이제 내 인생을 다 잡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겐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 목표가 어쩌면 제 삶의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목표 이후에 어떤 계획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공허했습니다. 목표가 내 인생에 전혀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내 삶의 의미는 뭐지'하고 묻게 되었죠.



혼자 있기 싫은 밤을 매일같이 보낸 탓에 새로운 목표를 찾아다녔지만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땐 목표가 없어도 된다는 사실도 모를 때였죠. 그런 시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자체를 점점 잃어갑니다. 그리고 비관적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저의 경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모두 미련해 보였습니다. 별 것도 아닌 인생, 되게 아등바등 산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했죠. 그러면서도 저는 열심히 사는 그들을 동경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가 묻고 싶었습니다. 왜 열심히 사냐고. 당신이 열심히 살 수 있는 이유. 즉, 당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일을 하고 있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누구보다 저는 삶의 의미에 대해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거 같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저와 그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의 인생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저는 그 궤도에서 빠져나와 이 고민에만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에 명확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달리는 기차에서 이런 고민을 했다면, 어느 순간 그 지옥 같은 질문을 뿌리치고 10년 뒤, 혹은 2~30년 뒤에 그 철도의 끝에 다다라서야 다시 이 질문을 시작했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서른 살에 고민이 많아지는 이유요, 은퇴 시기가 되어서야 사춘기가 온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저는 그들이 미루고 있는 고민을 21살에 했을 뿐인 듯합니다.



그렇게 20살부터 삶의 의미를 물었고, 그 질문은 비로소 23살에 해결됐습니다. 답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질문이 사라졌다는 표현이 조금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삶의 의미를 묻지 마라. 삶의 의미는 묻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질문을 잊고 살아갈 때 찾아온다." 저는 인생이 나를 통해서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그에 응하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류시화 시인의 참으로 곱고 깊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이 있는데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의 서문 중 일부입니다.



젊었을 때 나는 삶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었다. 진리와 깨달음에 대해, 행복에 대해, 인생의 의미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그 질문들에 삶이 평생 동안 답을 해 주고 있다. 그때는 몰랐었다. 삶에 대한 해답은 삶의 경험들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스승을 찾아 나라들을 여행하고 책들을 읽었으나, 내게 깨달음을 선물한 것은 삶 그 자체였다. 이것은 '우리는 자신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여행이 우리를 만든다.'는 명제와 일치한다. (...) 여기 모은 산문들은 내가 묻고 삶이 답해준 것들이다.



류시화 시인은 빅터 프랭클과 다르게 내가 묻고 삶이 답해준 거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제가 읽기에 빅터 프랭클과 류시화 시인은 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삶이 나를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삶의 의미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말이 어렵죠. 예컨대, 삶의 의미를 '가족'이라는 명사로 말해도, 자신이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지도 않으면서 그저 '가족'이라고만 정의하면 달라질 게 없습니다. 진정 가족을 위해 살고 있을 때 의미는 성취됩니다. 그리고 그럴 땐 굳이 '가족'이라고 명사형으로 말할 필요도 없죠. 하지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묻게 된다면, '명사'로 대답할 수밖에 없으니, '가족'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고, 결국 이 질문은 의미를 성취하지 못하게 막는 질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는 '동사'의 상태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말이 어려운가요. 자서전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서전을 쓰고자 합니다. 이 사람은 책상에 앉아 평생 동안 '내 인생은 무엇인가'하고 묻습니다. 자서전을 채우는 것은 질문이 아니라 삶입니다. 삶을 살면 자연스럽게 자서전에 채울 내용이 생겨나는데, 매일같이 '내 인생은 무엇일까?'하고 질문만 던지고 있으면 아무런 내용도 생길 수 없습니다. 결국 이 사람의 자서전엔 아무 글도 채워지지 못합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지 못하게 막습니다. 인간은 바깥을 바라보며 바깥과 나 자신이 '동사'의 상태로 상호작용하며 삶의 의미가 자연스레 성취되는 것인데, 계속 삶의 의미를 묻고 있으면 동사가 아닌 '명사'의 상태에 머물러 삶을 살지 못합니다. 또 바깥을 보지 못하고 나만 바라보기 때문에 내 안에서 무의미한 순환을 하고 삶의 의미가 성취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결론이 '삶의 의미를 묻지 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질문에 빠져들기 시작한 사람에게 그 질문을 멈추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그 질문의 끝에 다다라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이 나를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전에 누군가가 조언하길 '그 질문이 당신을 막고 있다. 그 질문은 쓸모없다.'라고 말해봤자, 직접 깨닫기 전에는 와닿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그 진리를 쟁취해야만 그 질문은 비로소 사라집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질문이 사라지는 경지입니다. 저는 그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0살의 제가 그러고 있듯이 말이죠. 그 순간이 오기까지 치열하게 물어도 좋습니다. 그럼 어느 순간 그 질문이 부질없음을, 그리고 그 질문이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막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까지 가는 시간은 절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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