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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수 Dec 18. 2024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진화했다

그들 모두가 아름다웠다, 찬란한 대한민국...

참담한 나날이었다.

딥페이크를 연상시키는 기막힌 장면이 TV에 등장한 후로, 우리 사회는 순식간에 40년 전으로 퇴행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상황에 처음에는 어이없음으로, 곧이어 분노와 모욕감으로 손이 떨리고 심장이 요동쳤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에게 상황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들의 표현처럼 내 손으로 저 몇몇을 ‘처단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상상까지 들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신 선열들의 절절했던 심정이 와닿는 순간들이었다.


지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몰지각과 몰염치에, 공동체 의식과 역사의식, 연대의식과는 동떨어진 지극히 이기적이고 위험천만한 독재자의 미친 신념에, 대한민국이 놀아나고 있다. 구석구석 철저히, 국가를 무너뜨리고 있다. 어디에도 성한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야말로 퍼펙트한 붕괴다. 미쳤다는 말 외에 우리가 아는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고, 그 설명에 사용된 단어들마저 자기는 ‘그런 애’ 아니라고 하소연할 판이다. 기가 막힌 사건이 연일 벌어지는데, 그 와중에 부역자들은 눈까리를 굴리며 어떡하든지 제 한 몸 보전할 궁리만 한다. 역시나 거기에 국가나 민족은 없다. 탄핵 트라우마란다. 국민이 겪었을 고통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저들의 이해득실만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저들의 지도자를 지켜야 하는 이유도,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다. 제 이익에 맞지 않으면 그 지도자도 헌신짝이다. 제 권력만 지켜준다면, 외국의 군대가 진주해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다. 전쟁을 일으켜 옆 나라 군대를 끌어들인다는 음모론이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잘해주던 나라였고, 그 나라도 저 사람을 참 좋은 정치인이라고 했으니까. 자기편이고 힘이 되어 준다는데, 국적이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비극의 그 날,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비정상의 상황을 신속히 타개하기 위해 부랴부랴 국회로 달려온 시민과 의원들, 명령을 받고 출동했으나 어이없는 광경에 주춤거리며 선뜻 행동하지 못하는 하급 군인들까지. 머리 위로 헬기가 날아다니고, 거리에는 장갑차가 등장하고, 곳곳에서 몸싸움이 벌어졌지만, 피 흘려 쌓아온 이 민주주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뜨거운 결기를 우리는 보았다. 그 시간, 본청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총을 메고 다가오는 특수부대를 맞는 국회 관계자들과 시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계엄까지는 아니더라도 80년대에 대학가에서 매일 오후 벌어지던 대정부 시위를 경험한 사람은 알 것이다. 머리 위로 날아오는 최루탄과 발치로 깔리는 지랄탄과 사과탄이 난무하는 와중에 백골단과 전경들을 향해 돌멩이와 화염병이 날아가고, 급기야 대열을 이루고 맞붙어 곤봉과 쇠파이프를 교환하던 그 상황들이 당사자들에게 얼마나 두렵고 가슴 떨리는 순간인지를... 심지어 이번은 계엄 상황이었다. 계엄이란 군인의 총칼에 목숨마저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무장을 하고 다가오는 특수부대원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설령 80년대의 가두 시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TV로 바라보면서도 가슴이 떨렸다. 아마도 이날 가족에게 혹시 모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온 시민과 의원들도 분명 많았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피를 보는 순간, 양쪽 모두 이성을 잃고 상황은 통제 불능에 빠져들 터였다. 만에 하나 총성이라도 울린다면...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다행이라고 할까. 다가서는 군인들의 움직임에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전사들에게 민간인과의 실랑이가 웬 말인가! 시민들과 그저 밀고 당기고 할 뿐, 선임으로 보이는 몇몇은 흥분한 동료를 자제시키고 쓰러진 시민을 일으켜 세웠다. 쓰러진 군인을 일으키며 서로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시민들도 있었다. 흥분한 시민을 군인이 안아서 진정시키는 모습, 또 흥분한 채로 군인 한 명을 둘러싼 시민들을 다른 시민들이 제지하는 모습까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시민과 정치인뿐 아니라 군인들까지도, 자신의 본분을 수행하기 위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배려하고 있었다. 이미 지식인으로 민주적 가치 속에서 살아온 군인들에게, 그 가치관에 반하는 모호하고 비정상적인 지시로는 도저히 그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었다. 그곳의 우리 각자는 서 있는 자리만 다를 뿐, 민주주의로 철저히 세뇌된 건강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또 하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한 단계 진화시킨 MZ 세대를 빼놓을 수 없다. 비교적 완성된 민주주의 국가이자 선진국에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하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MZ 세대가 시민운동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각양각색의 빛나는 응원봉과 재치 넘치는 깃발을 들고 마치 콘서트를 즐기듯이,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민주주의를 외치는 그들의 모습은 21세기 민주주의의 진화된 모델을 제시했다. 전 세계가 열광했다. 폭력적 시위가 아니라 흥겹게 춤추고 노래하면서도 가장 무거운 메시지조차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음을 그들은 입증했다.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에 갈채가 쏟아졌다. 역시 대한의 딸과 아들이다.

     

80년의 광주가 그랬고 80년대의 정치 시위가 그랬고 지금의 모습도 그렇듯이, 독재자들은 국민의 군대로 국민을 공격하고 살상한다. 그래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저들의 하수인과 그 대항자로 나뉘어 서로 싸우고 피를 흘린다. 국민을 장기판의 말과 같은 존재로 이용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저들은 보수가 아니다. 보수는 자유롭고 질서 있는 사회를 지향하며, 급격한 변화보다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선호한다. 그런데 저들이 말하는 자유는 저들의 입장에서의 유희이며, 저들이 말하는 질서는 저들을 중심으로 편제된 체계를 말한다.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발전을 선호한다면서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난동을 감행하는 성향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단어는 지구상에 이것밖에 없다. ‘독재’와 ‘독재자.’ 그리고 역사적으로, 독재자는 어김없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법과 국민의 손에...

     

가끔, 80년의 그곳이 광주가 아니라 다른 도시였더라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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