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시인의 고향, 명동마을 어귀에서
오래된 사진앨범을 열어보는 마음으로 팟캐스트에서 세월이 한참 지난 라디오 방송을 찾아 듣곤 한다. 이제는 거장이 된 영화감독이나 스타가수들의 데뷔 무렵의 인터뷰를 듣고 있자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진행자의 질문에 긴장한 채로 대답하는 풋풋함이 재미있다. 그들 대부분은 패기가 넘쳤지만 종종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미 그의 미래를 다 알고 있는 나는, 스튜디오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귀에 대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곤 한다. 다 잘 될 거라고, 걱정 말라고.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꿈같은 상상...
‘연길서역’. 큼지막한 한글로 써진 기차역을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연길 시내로 들어간다. 공산당의 선전 문구도 한글이고, 버스정류장과 도로변의 간판도 한자보다 한글이 먼저 표기되어 있다. 중국의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낯설고 또한 익숙한 조선족 자치주(自治州)의 풍경. 짐을 한 보따리 싸들고 억센 사투리로 대화를 나누는 할머니들 사이로 차창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한국의 어느 소도시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
시인이 나고 자란 용정의 명동마을은 우리네 시골과 다르지 않다. 작은 산과 밭이며 낮은 담장들, 낡은 교회당과 오래된 기와지붕.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가난한 이웃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 같은 그런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정자. 어린 시인은 토속적인 환경에서 서정적인 모국어의 세례를 받았으리라.
고요한 골목길을 거닐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꼬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책보를 둘러매고 돌아오는 아이들 사이에서 동주를 찾아내어 살며시 불러내고 싶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고 쓰인 손때 묻은 시집 한 권을 그의 손에 들려주고 싶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볼 소년에게 다짜고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누구도 너를 히라누마 도쥬(平沼東柱)*로 기억하지 않을 테니, 윤동주(尹東柱) 이름 석 자로 또렷하게 기억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부끄러움은 정작 부끄러워해야할 이들의 몫이지 네가 짊어져야 할 짐은 아니라고, 그러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육첩방(六疊房) 남의 나라에서 시를 쓰게 되더라도 무기력한 처지를 괴로워하며 자책하지 말라고. 무엇보다 너의 詩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고, 또한 그들이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를.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꿈같은 상상...
* 창씨개명한 윤동주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