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밤하늘엔 유재하의 노래가 흐르고

11.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by 불꽃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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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받은 상처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語)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세상을 등지지는 않으나 사람들의 말을 그저 무의미한 배경음처럼 두고 지내고 싶다는.


쿠바의 작은 해변마을 쁠라야 히론(Playa Giron)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유배시키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이름난 관광지가 아니어서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한국여행객들 사이에서 입소문도 덜 탄 곳. 번역을 하면 ‘전망 좋은 집’이라고 하는 까사*에 나는 짐을 풀었다.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까사에는 유럽에서 온 여행자들만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그곳에서 주된 일정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바다를 오가는 것이었다. 아침, 낮, 저녁, 밤, ... 햇볕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파도와 바람이 무심하게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가, 앙금처럼 남아있는 부유물을 쓸고 갔다.


나와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부부는 늘 가만히 웃어 주었다. 그러던 차에 주인아주머니가 내게 부탁을 하는 일이 생겼다. 휴대폰을 바꿨는데 예전에 쓰던 폰에 저장되어 있던 가족사진이며 음악파일을 새 폰으로 옮기고 싶었던 것. 2G폰이어서 조작이 어렵지 않았다. 파일을 옮기려는데 ‘coreano musica'라는 제목의 폴더가 보였다. 예전에 여기에 왔던 한국사람이 주고 갔다고, 그 노래들을 좋아한다고 아주머니는 손짓으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이왕 하는 김에 내 휴대폰에 들어있는 <유재하 1집>도 함께 저장해드렸다.


그 후로 내가 까사에 들어와 머물면, 부부는 스피커로 연결해서 빵빵하게 틀던 쿠바풍의 댄스곡 대신 유재하의 노래를 틀어놓았다. 덕분에 ‘가리워진 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사랑하기 때문에’ 같은 곡들을 지겹도록 눈물 나게 듣게 되었다.


부부는 ‘헬로우’ 정도의 영어만 가능했고, 나는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정도의 스페인어만 알았기에 그들이 진짜 그 노래들을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접시 위에 놓인 고기의 크기가 다른 여행자들 것보다 조금은 더 컸고, 다른 이들 몰래 커피를 공짜로 타주기도 했으니 내 작은 호의에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건 분명했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하숙집의 따뜻함이 있던 그곳. 대문 앞에서 부부를 차례로 포옹하고 돌아설 때, 가슴으로 묵직한 무언가가 출렁였다. 순간,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어깨끈을 조여 매고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갔다. 모국어 속으로 기꺼이 섞여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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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사(casa) : 스페인어로 집을 뜻하는 말인데, 쿠바에서는 일반적으로 여행자들이 머무는 민박 개념의 숙박시설로도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