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뉴욕 월스트리트의 황소상과 소녀상
세월을 잊어버린 섹시한 마릴린 먼로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합니다. 스파이더맨과 트랜스포머도 먼저 인사를 건네며 다가옵니다. 그러나 나는 미소로 괜찮다고 했습니다. 굳이 돈을 써가며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Walk of Fame)를 거닐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곳을 ‘스타의 거리’로 읽고 기억했답니다.
메이저리그 명문구단 뉴욕 양키스의 홈구장 복도에는 구단을 빛낸 전설적인 선수들의 사진이 즐비합니다. 핫도그를 입에 물고 베이브 루스와 디마지오의 오래전 모습을 바라보다가, ‘명예의 거리’를 ‘스타의 거리’로 발음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스타 + 스토리 = 꿈’이라는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예전만큼의 선망을 잃었다고는 하나 여전한 ‘아메리칸 드림’의 파워이기도 했습니다.
200년 남짓한 미국역사에서 최신버전의 꿈을 찾고자 한다면 아마도 뉴욕의 월스트리트로 가야겠지요. 거기에는 금융자본의 전성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꿈도 함께 있을 듯했습니다.
뉴욕증권거래소 앞에 있는 ‘돌진하는 황소상’. 황소상의 중요 부위를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그날도 ‘거시기’를 만지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나도 기꺼이 줄을 섰습니다. 거시기는 손길을 너무 많이 타서 애처로울 정도로 반질반질 빛났습니다. 황소를 에워싼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 탓에 사진을 찍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각자도생의 살벌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우리들의 몸부림 같았습니다.
그런데 황소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기업에서 여성 임원을 늘리라는 취지로 어느 투자가가 세운 소녀상이라고 했습니다.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황소를 당차게 응시하는 소녀의 이름은 ‘두려움 없는 소녀상’. 그것이 만들어진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꿈을 설계하기 전에 가능하다면 모든 종류의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꿈’보다 ‘깸’이 먼저입니다. 집단적 몽유(夢遊)는 집단적 아픔 없이는 깨어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속에서도 이것은 꿈이라는 자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 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저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스타를 위해 배경이 되어준 존재들을 망각한 이야기는 허구일지 모릅니다. 빛나는 별이 되기 위해 다른 이의 꿈을 짓밟고 이룬 성공 스토리는 기만일지도 모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언제나 사람들을 유혹하는 처세와 성공에 관한 이야기들... 그것들을 읽기 전에 소녀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여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월스트리트의 소녀상은 임시로 설치된 조형물이라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처지라고 했습니다. 가급적이면 황소가 머무는 동안에는 소녀도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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