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이스탄불 블루모스크, 편견과 이해 사이에서
터키 최고의 이슬람 사원 ‘술탄 아흐메트 1세 모스크’는 돔을 장식한 푸른빛의 타일로 유명하여 흔히 ‘블루 모스크’로 불리는 곳. 아흐메트 1세는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모스크를 ‘황금(altun, 알툰)’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그 말을 비슷한 발음인 ‘6(alti, 알티)’으로 잘못 알아듣고 모스크에 6개의 첨탑을 올렸다. 그리하여 블루 모스크는 6개의 첨탑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큰 문제였다. 왜냐하면 각각의 모스크는 건립한 사람의 지위에 따라 첨탑의 개수를 달리하는데, 6개의 첨탑은 오직 메카의 성전에만 허용된 절대적인 위엄이었던 것. 가만두면 술탄이 메카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 고심하던 술탄은 메카의 성전에 한 개의 미나렛을 더 만들어 바치며 난감한 상황을 타개했다. 발음 한 끗 차이가 만들어낸 역사적인 해프닝이었다.
블루 모스크는 예배시간에는 관광객들을 받지 않았다. 개방이 허용된 시간대에도 예배공간에는 무슬림 이외의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모스크 본당에 들어서니 높은 천장은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붉은 양탄자 바닥을 따스하게 비추었다. 금줄 바깥에 서서 예배를 기다리는 무슬림들을 보았다. 작은 책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노인은 동그란 안경알 너머로 코란을 읽고 있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는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건한 모습과 사뭇 다른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스마폰을 보거나 낮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엄숙한 모습만을 상상했는데 그 환상이 깨어지자 내 마음에도 작은 일탈이 일어났다. 마침 점심식사를 하고 나른하던 터, 금줄 밑으로 몰래 기어들어가 잠자는 신자들 사이에 누웠다.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모스크 안에 관광객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있던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기도 애매하고, 이렇게 된 김에 알라를 향한 의식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모스크는 절이나 교회당에 비해서 예배를 집행하는 공간이 단출했다. 알라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이슬람 정신이 성직자의 권위를 크게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인가. 신자들은 ‘당신이 먼저 왔으니 앞에 서세요’ 라는 눈빛으로 나를 자꾸 앞으로 떠밀었다. 뒷줄에서 대충 따라하면 되겠거니 했는데 어느새 두 번째 줄에 서고 말았다.
경건한 예배에 재를 뿌려서는 안 된다는 일념뿐이었다. 앞줄에 선 사람들의 동작에 집중했다. 양손을 배로 모아서 눈을 감고 중얼중얼, 양손을 귀 옆으로 올려서 또 중얼중얼, 허리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 보았다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가, 다시 일어섰다가, … 다음 동작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눈동자를 땀이 나도록 굴렸다.
그런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는 동작은 따라 하기가 힘들었다. 양발을 똑같은 형태로 하면 편할 텐데, 그들은 왼발의 발목은 오른쪽으로 완전히 꺾고 오른발의 발가락은 세우는 기이한 형태를 취했다. 앉기에도 보기에도 불편한 삐딱한 자세. 아마도 터키사람들은 좌식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게 어정쩡하게 앉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며칠 뒤 나는 이스탄불을 떠나 카파도키아로 갔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야샤르는 한국인 부인과 살고 있었다. 그의 한국어는 미묘한 뉘앙스까지 이해하고 구사하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편안하게 우리말로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침 블루 모스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다가 궁금했던 무릎 꿇고 앉는 자세에 대해 물었다. 내 질문에는 이미 좌식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서 편하게 앉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확신이 깔려 있었다.
“아, 그거는 선지자 마호메트 때문이에요. 마호메트가 그 자세로 앉았다고 해요. 그래서 모든 무슬림들은 마호메트를 따라 그렇게 하는 거죠.”
야샤르가 대답했다. 그리고 터키사람들도 좌식생활을 하기 때문에 무릎을 꿇거나 쪼그려 앉는 동작이 어렵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흔히 여행을 일컬어 편견을 깨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행하는 것만으로 저절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여행의 제한된 경험은 오히려 편견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아마 한국어가 유창한 야샤르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오랫동안 무슬림의 예배 자세를 오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 끗 차이’에 대한 주의와 겸손이 어디 여행에만 해당되는 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