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오늘도 유니폼을 입는다

기내에서 살아남기(3)

by 여름소녀

내 꿈은 히어로였다. 어릴 적부터 영웅들을 동경해왔다. 밤이면 정체를 숨기고 가면을 쓴 채 악당들을 혼내주는 모습에 내 작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곤했다.

영웅이 항상 승리만 하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악당들에게 질 때도 있었고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해지기도 했다. 실수를 하는 모습에선 인간적인 모습이 보여서 더 좋았다. ‘아, 영웅도 실수를 할 수 있구나’ 라고 내심 안도가 되었다고나 할까.

영웅의 뒷모습은 늘 거대해보였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해보였다. 영웅은 멋있고 또 외로운 사람이구나,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영웅을 꿈꾸며 자랐지만 나는 영웅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내가 극장에서 본 영웅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늘 바빴었는데, 나는 하루하루 일인분의 역할을 온전히 해내기 위해서 바빴다. 힘든 하루를 마친 날이면 문득 영웅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그는 그의 세상을 구했고, 나는 나의 세상을 구했으니 나의 뒷모습도 어쩌면 조금은 위대해보이지 않을까 하고.


어른이 되고나서는 일상 속에서도 영웅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내가 일등이라고 생각하고 탑승한 새벽 공항 버스에는 그보다 먼저 출근해서 나를 안전하게 데려다 주시는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도 있었고, 과일을 고를 때 아무거나 담아주시는게 아니라 매의 눈으로 가장 잘 익은것만 골라 주시는 과일가게 아저씨도 있었다. 내 주위에는 이렇게 많은 영웅들이 숨어 있었다.


내가 일하는 작은 공간에서도 숨은 영웅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좌석 위의 선반이 너무 무거워서 못 닫고 있으면 슈퍼맨처럼 등장해서 대신 닫아주는 동료도 있었고, 자신이 고른 기내식을 기꺼이 양보해주는 승객도 있었다.


하루는 비행 중에 아기가 심하게 운 날이 있었다. 유난히 바쁜 날이었는데, 아기의 부모는 아이를 어르고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고 주변에 앉은 승객들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앉아 있었다. 급기야 나에게 아기를 조용히 시키라는 승객도 있었다. 기내식을 다 나눠주기 전이라 마음은 급했고 아이의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서비스가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더이상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슨일인가 하고 살펴보니 아이의 뒷자리에 있던 노부부 승객이 아기를 요리조리 달래고 있었다. 그 날, 그 비행기에서 영웅은 그 노부부였을 것이다.


따뜻함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면, 어쩌면 영웅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영웅이기 때문에.


스파이더맨 처럼 간지나는 슈트는 없지만 오늘도 유니폼을 입고 나의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여정을 떠난다. 손목에서 거미줄이 나오는 초능력은 없지만 (때로는 정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두 손 가득히 기내식을 들고 따뜻함을 채우기 위해서 분주히 (그리고 때로는 외로이)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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