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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백만송이 장미, 심수봉 vs 하현우

by 설애

석사 논문을 쓰던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은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였다. 학비를 벌어가며 논문을 쓸 때 들었던 곡이다. 힘들어서, 미운 사람이 많아서 들었던 곡이다. 사는 게 힘들면 도피하게 되는데, 나는 주로 노래 속으로, 세상과 잠시라도 단절하는 쪽을 택했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건 실험실의 밤공기,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이다.




실험실은 좁고 폐쇄적인 조직이다. 지금은 학생 유치를 위해 월급도 많이 준다고 들었는데, 십수년 전에는 월급이 적어서 학비를 벌어가며 논문을 쓰는 일은 고되었다.

박사 과정과 호흡을 맞추어 진행해야 하는 일이 많았으니 5시~6시만 되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나는 꽤 많은 눈총을 받았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11시나 12시쯤 돌아와 논문을 보고 실험을 하고 새벽에 실험실 한 구석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거나 여학생 수면실에서 잠을 자고 돌아와 수업을 듣고 논문을 쓰고 실험을 했다. 랩 짱(실험실 학생 대표)은 아르바이트를 가는 나를 불러 세워 "네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실험실 일을 다른 사람이 해야 하는 건 생각해 봤어?"라며 몰아세우기도 했다. 나는 학비가 없으니, 우선순위가 아르바이트가 되었다. 그래야 일단 학교를 다닐 수 있으니까.

랩 짱과 일대일 면담도 많이 했고, 그 와중에 박사과정이었던 지금의 남편과 연애 중이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석사과정이던 그를 만나 사귀고 있었는데, 전공을 선택한 것이지 그를 따라간 것이 아니었음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고까웠다. 나는 그게 억울했다. 실험실 속 내 인간관계는 좁고도 복잡했다.

석사 2년 차에는 산학장학생이 되어서 학비를 받아 조금 여유 있게 졸업했다. 산학장학생에게는 노트북을 사라고 300만 원을 주었는데 랩 짱은 그 돈을 실험실 비로 달라고 해서 거절했다. 이 실험실에 있어서 산학장학생이 되었으니 내놓으라는 논리였다. 나는 이 실험실이어서 산학장학생이 된 것은 맞지만, 그럼 앞으로 월급도 내놓아야 하는 건지, 왜 실험실 대상으로 받은 돈이 아닌 것을 굳이 내놓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거절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시절, 나와 같이 실험했던 박사과정 선배님은 "살다 보면 10명 중에 내 편이 반드시 있게 돼있어. 내 편을 보고 살아."라는 명언을 전하고, 내 편이 되어주었다.




미워하지 않으려 했으나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줄 세워놓고, 모두 지나갈 거라고 되새기며 들었던 노래이다. 졸업하고 취직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희망이 바로 앞에 있었으므로 버텼던 시기를 함께 한 음악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채웠던 노래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그 시절의 나는 이 구절을 무한반복하고 있었다.




[가사 전문]


심수봉 작사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송이 피워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헤어져간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이었기에
수많은 세월 흐른 뒤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빛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런 사랑 나를 안았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이젠 모두가 떠날지라도 그러나 사랑은 계속될 거야
저 별에서 나를 찾아온 그토록 기다리던 이인데
그대와 나 함께라면 더욱 더 많은 꽃을 피우고
하나가 되어 우리는 영원한 저 별로 돌아가리라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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