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라파우 블레하츠를 쇼팽의 현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단지 그의 외모나 분위기 등의 감각적 요소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루빈스타인 이후로 쇼팽의 음악관과 정신에 가장 잘 부합하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연주자가 바로 블레하츠라는 것이다. 이는 쇼팽 콩쿠르가 언젠가부터 쇼팽만의 고유한 요소들-고매하고 섬세한 슬픔의 정서, 내성적이고 병약하면서도 심지가 곧은 귀족적 정신성, 형식에 대한 진지한 탐구 정신 같은 중요한 요소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화려한 기교와 정교한 타건, 빠른 연주와 쇼맨십에 치중한 기술적 경합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비판 가운데 자리한 시의적절한 평가라 생각된다. 실제로 쇼팽의 음악에 대한 보편적 몰이해의 만연, 소위 호모포니 뽕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 데에는 콩쿠르의 변질이 기여한 바가 크지 않은가? 허나 음악은 서커스나 빨리 먹기 대회 같은 게 아니며, 수상 경력으로 연주자를 평가하고 편견을 갖는 것처럼 멍청하고 빈곤한 일도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일관성 있게도, 콩쿠르 전 부문의 상을 휩쓸며 화려하게 우승한 블레하츠는 이후 남들처럼 가시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데에 급급하는 대신, 조용히 은거하며 자기 음악세계를 갈고 닦는데 몰두한다. 콩쿠르 전과 후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해석의 이론적 풍부함을 강화하기 위해 철학 학위를 취득하고, 레파투아 확장에 욕심내기보다는 몇몇 작곡가에 천착하며 자신의 피아니즘을 심화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바흐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듣던 바흐의 오르간 곡들에 대한 따스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그에게 바흐는 피아노를 처음 시작하던 때부터 이미 정해진 목표이자 코어였기 때문이다. 블레하츠의 연주는 지적이면서도 낭만적이고, 극적이면서도 절제되어 있다. 치우침이 없고 밀도가 고르다. 나는 감사하게도 정말 좋은 친구를 둔 덕에, 일전에 블레하츠와 짧은 시간이나마 식사를 하며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있는데, 이는 그가 음악 일반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에 기인하는 것 같다. 블레하츠는 위대한 음악들에 다가갈 때, 정말 조심스럽게 그리고 학구적인 태도로 진지하게 접근한다. 자신의 해석에 관하여 충분한 확신이 들기 전가지는 경솔하게 건반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오만하지도 과시적이지도 않으며, 고양된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써 음악을 소모하지도 않는다. 물방울처럼 깨끗하고 명료한 음색으로 음악 본래의 아름다움을 밝힐 뿐이다. 비르투오조적 실력을 가졌지만 그걸 휘두르지는 않는다. 그의 조심스러움은 첫 바흐 녹음을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 아닌 이탈리아 협주곡과 몇 개의 듀엣, 파르티타로 정하였다는 점에서 명징히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나침반 하나 들고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처럼 바흐를 해석하고 연주하는 것이다. 감히 생각건대, 이러한 철학자적 면모 없이 세속화된 감수성으로 바흐에 접근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형식적으로 이미 완벽한 바흐의 대위법은 과도한 해석이나 엄청난 기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주자는 그저 위대한 음악의 힘을 믿고, 확신을 갖고 연주하면 나머지는 음악이 알아서 완성해주는 것이다. 블레하츠의 바흐 연주는 그 조심스러움만큼 명료하고 확신에 차 있다. 이탈리아 협주곡은 즐겨 듣는 곡은 아니지만, 21세기에 녹음된 것 중에선 블레하츠의 탁월함이 돋보인다는 생각이다. 한편 몇몇 비평들을 읽어보니, 쇼팽 외의 레파투아, 특히 바흐나 베토벤에 있어서 그의 연주가 참신하지 않고 예측가능하여 지루하다는 평도 보인다. 고전 음악들로부터 현대적인 의미의 역동성, 굴드와 같은 임팩트를 기대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리 정당하지 않은 통속적인 기대라고 생각하지만 전문가도 아닌 내가 할 말은 아니라 더 부연하지는 않겠다. 다만 요즘과 같은 상실의 시대(?)가운데서도 쇼팽의 고귀한 정신을 간직한 연주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나는 축복이라 생각하며, 장차 점점 더 원숙해지고 완성되어 갈 그의 바흐 연주를 기대하고 또 응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