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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시 May 27. 2024

삶은 원래 미지의 영역

오늘 나의 결핍은

미지 (25)

내게 모성애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건 19살 때였다. 담임선생님은 열아홉이었던 나를 모성애가 많은 아이로 설명했다. 생기부에 적힌 모성애라는 세 글자에 가슴이 쓰라렸다. 나는 모성애라는 걸 느껴본 사람이었던가? 


3살에 엄마를 잃어버렸다. 아니, 엄마는 날 버렸다. 엄마는 날 오빠보다 더 좋아했다고 했다. 내가 엄마의 얼굴을 닮아서. 엄마가 아빠 몰래 유치원에 다녀가는 날이면 난 온종일을 울었다. 엄마는 다음번에 온다는 얄궂은 약속만 남겨놓은 채 사라졌다. 그리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스물다섯을 먹은 난, 다시 온다는 약속이 참 싫다. 내 남자친구는 아마 모르겠지. 나의 모든 이별 사유가 그가 뱉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뿐이라는 걸


초등학교 때부터 난 새 학기가 찾아오는 게 싫었다. 가족 소개서를 내면 다음 달에 난 엄마 없는 애가 되어 있을 텐데. 왜 선생님들은 그런 중요한 걸 꼭 반장한테 내라고 하는지. 그때부터 난 매번 반장선거에 나갔다. 반장이 되면 나의 비밀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체육대회에 엄마가 오지 않는 것. 소풍을 갈 때 내 도시락은 항상 신문지에 싸인 김밥나라 아줌마의 김밥이었던 것. 이 모든 것들이 익숙해질 때쯤, 점점 사람들도 이혼 가정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였으나,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외롭고 아팠던 어린 시절이 아무렇지 않은 게 되어버릴까 봐. 그래서 날 버린 엄마까지 날 영영 잃어버리고 아무렇지 않을까 봐. 


성인이 되고 나서는 받아들이기 싫지만 난 엄마를 이해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나처럼 엄마의 20대도 그랬을 수 있겠다 싶어, 그럼 자식보다 당신의 삶이 더 중요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난 혼자서 엄마를 용서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다시 엄마를 미워하게 된 것은 며칠 전 일이었다. 


이사를 위해 대출을 알아보던 중 한 부모 자녀에게 혜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게 웬 떡이구나 싶어 얼른 가족관계증명서를 뗐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처음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가족관계증명서에는 처음 보는 엄마의 이름이 있었다. ‘강00’ 엄마와 아빠의 가족증명서를 모두 열어버렸다. 아빠의 가족에는 나와 오빠뿐이었는데, 엄마의 가족에는 나와 오빠를 지나 새로운 배우자와 자식들의 이름까지 있었다. 엄마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은 오빠와 내가 엄마로부터 버려졌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듯했다. 엄마의 새로운 배우자가 아빠보다 10살이나 더 많다는 사실은, 절대 아빠에게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5살이나 많은 당신이 부담스러웠을 거라고 아빠도 나름대로의 합리화로 엄마를 용서하는 과정에 있을 테니까. 


엄마의 가족관계증명서를 처음 들여다본 그날, 나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엄마가 가장 고통스러워할 만한 방식으로 엄마의 삶을 처절하게 망가뜨리겠다는. 





위 글은 며칠 전 시나리오를 작성하면서 교수님께 전한 글의 일부분이다. 

지금은 많이 바뀐 형태로 작성되고 있지만, 주인공 미지는 나와 많이 닮았다. 

미지의 이야기에는 나의 결핍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글을 쓰는 내내 순탄하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 때문에, 

미지도 이렇게 힘든 인물이 된 건 아닌가 하는 미안함이 잇따랐다. 


교수님은 미지의 이야기를 읽고 처음으로 내 글이 좋다고 했다. 

'미지의 이야기가 정말 드라마 같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내느라 온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그래, 나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구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뒤부터

난 혼란스러웠던 어린 시절로부터 보답을 받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글을 쓰면서 가장 분명히 느끼는 건 

결핍은 꺼내면 꺼낼수록 그 색이 옅어진다는 것이다. 

없앨 수는 없어도 흐려질 수는 있으니까-. ..



우리 모두가 아팠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더 선명한 어른이 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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