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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흙표범 Nov 06. 2023

쌍둥이칼 하나 못 사는 자유

(부제 :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의 차이)

이 삼천 원짜리 다이소 칼은 10년은 된 것 같은데?’

‘도마에 까만 것은 곰팡이인가?’

‘이 그을린 냄비로 요리를 할 수 있을까?’     


신혼여행에서 도착한 다음날 아침, 싱크대 앞에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배도 고프고, 한식도 그리워서 뭐라도 먹을 게 없을까 싱크대를 뒤지는 중이었다.

결혼 전까지는 집에서 뭘 해먹은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내가 가진 주방살림은 나 자신에게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10년 전쯤 산 것 같은 다이소 식칼은 손 베일 걱정이 없을 정도로 무뎠고,

도마의 중간 부분은 곰팡이로 덮였고,

은색이었던 스틸냄비의 내외부는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싱크대 윗 선반에는 엄마가 준 30년 넘은 그릇이 가득했다. 

만 36살에 중국 유학에서 돌아왔을 

"좀 있으면 결혼할 거니 그전까지 잠시만 써"  라며 엄마가 나에게 버렸던 그릇이었다.  

    

우리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딱 5주 준비해서 결혼을 했다. 일을 하면서 셀프로 스몰웨딩을 준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기에 신혼살림은 결혼 후에 하나씩 사기로 했고, 이제는 정말 사야 할 타이밍이었다. 


도마나 그릇은 어떤 브랜드를 사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가장 먼저 식칼을 샀다.

독일 쌍둥이칼’은 들어본 적 있었고, 결혼을 했다면 싱크대 위에 나무로 만든 칼꽂이가 있고 거기에는 여러 개 칼이 꼽혀 있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쌍둥이 모양이 그려진 아주 큰 상자가 도착했다.


“표범아, 뭐 샀어?”

“응. 칼이 없어서 세트로 하나 샀지~ 독일 거야.”

“나랑 상의도 없이? 우선 열어보자”


칼 몇 개 사는데 무슨 상의가 필요할까 싶어 대꾸도 없이 얼른 상자를 풀었다.

식칼 2개, 과일칼 1개, 가위 1개, 칼갈이 1개, 칼꽂이가 식탁 위에 놓여졌다.

기스 하나 없이 반짝거리는 칼을 보며 반짝이는 내 눈과는 달리, 에코의 표정은 어두웠다.


“왜? 맘에 안 들어? 이거 쌍둥이칼 중에서도 비싼 모델이야”

“식칼도 과일칼도 너무 날카롭잖아. 특히 칼 끝부분이 너무 뾰족해”

“아니, 칼은 당연히 날카로운 거 아니야?”

“이거 쓰다가 잘못해서 바닥에 떨어뜨리면 발가락 신경까지 나가겠는걸, 네가 정 쓰고 싶다면, 뾰족한 끝부분이라도 펜치로 좀 부러뜨려서 평평하게 하자”     


지금 막 언박싱한 새 칼을 일부러 부러뜨리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부분이 뾰족한 것도 다 용도가 있을 것이고, 조심해서 쓰겠다고 몇 번을 말해도 그의 손에는 이미 펜치가 들려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나마 안전한 식칼은 칼 끝부분이 반달모양으로 둥근 아시아 식도였고, 직접 개조를 해서라도 내가 산 끝부분이 뾰족한 서양식도를 아시아 식도로 만들 기세였다.


몇 분간의 대치상황 속에 결국에는 내가 항복을 하고야 말았다.

그의 완고한 입장은 단순한 지적질이 아니라, 혹시나 하는 걱정 때문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포장 비닐을 뜯어 버려서 환불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최대한 원래 상태처럼 칼세트를 다시 박스에 넣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경제적 자유, 시간적 자유를 포기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내 돈으로 쌍둥이칼도 못 사게 될 줄은 몰랐다. 

사소한 것에서 의견 충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칼도 포함된다니.

주방살림부터 침구까지 사야 할 리스트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접시 하나 까지도 상의해서 사야 하는 번잡함 때문에 그중 몇 개는 안 사고 낡은 것을 그냥 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크고 작은 결정에서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기준이 서로 다를 때,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과정이 아직은 쉽지만은 않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세월이 15년인데, 결혼생활 15년 차 정도 되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이 상황을 겪는 중이다.    

  



축의금을 낸 친한 사람들에게 점심을 사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결혼하고 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없냐는 질문에 쌍둥이 칼 얘기를 속사포처럼 했다. 얘기를 다 들은 여자 동료는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그걸 놓치지 않고 나는 신세한탄을 했다.


“그쵸? 내 돈 주고 칼도 못 사다니. 이런 게 결혼인가 싶어요”

“아니요. 그 포인트가 아니라, 칼도 안 사고, 냄비도 안 사고 결혼을 했다는 게 놀라워요”   

  

나는  에코가 이해가 안 됐었는데, 제3자가 보기에는 우리가 평범하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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