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집 16
후지와라 신야 라는 작가가 쓴 '티베트 방랑'이란 책의 서문에는 이런 글이 있는데,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옮겨보기로 하자.
지표는 여기저기서 타임 슬립을 하고 있다. 지구에 사는 다양한 민족이 동시에 지금이라는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의 지층 연대 위에 있다. 예를 들면 미 대륙 캘리포니아의 도시에 부는 바람 속에서 나는 도쿄의 오 년 후, 십 년 후의 풍경을 상상했고, 아시아 대륙 동안의 상하이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삼십 년 전 어릴 적 맡은 어떤 냄새를 떠올렸다. (중략) 이처럼 지구에는 다양한 지층 연대가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는 시간의 계측에 그런 다양한 지층 위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것을 뭉뚱그려 끼워 맞추는 사고방식은 하나의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진보한 나라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을 지금이라는 시간의 계량 기준으로 삼는 풍조는 단순한 오만이다. 지구에 사는 각각의 사람들에게는 각각의 지금이 있다.
후지와라 신야 「티베트 방랑」 중에서
저 서문 끝에는 1982년 1월이라는 시점이 적혀 있다. 그러니 작가가 상하이 거리에서 일본의 30년 전을 떠올릴 수도 있었겠지 싶다. 맞다. 우리는 각자 다른 시간대를 산다. 심지어 각각 흐르는 시간의 속도도 다르다. 도쿄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동안 상하이의 속도는 정신없이 내달려 아마 이제는 두 공간은 거의 같은 냄새를 품게 되었을 거다.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 당연한 이야기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서 볼 때마다 새롭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우리는 오죽하면 스스로를 '빨리빨리'의 민족이라 부르지 않나. 나의 시간대가 조금이라도 뒤쳐지는 것을 도통 견디지 못한다.
그게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그 '시간대를 따라잡겠다는 일념'이 마치 선사시대로 되돌어가버린 것 같은 전쟁의 폐허를 지금의 성취로 바꿔낸 원동력이 된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후지와라 신야의 말처럼 '하나의 시간대를 산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여러 시간대를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국가 안에서도 시간대는 다 다르게 흐른다. 언젠가 여수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고속도로가 동탄 쯤을 들어서자 확실히 풍경이 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로든 여행으로든 지방도시를 갈 때면 느껴지는 게 같은 도시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쇠락한 동네와 새로 조성된 동네의 느낌이 너무 다르다. 그렇다고 막상 서울은 균일하게 되어있나? 또 그렇지 않다. 자본이 많이 돌고 상대적인 가치가 높으니까 최대한 빠르게 새로운 아이디어로 기존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지, 시간이 동일하게 흐른다는 건 확실히 착각에 불과하다.
나 개인은 어떨까? 내 안에도 당연히 하나의 시간대가 흐르고 있지 않다. 나름 노력은 한다 하는데 아마 절대 최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다. 당장 노래부터 따져볼까? 이미 지오디 이후로 내게 보이그룹이란 존재는 미국 러시모어 산에 있다는 미 대통령 조각상 같은 것이어서 '있다는 걸 알아도 내가 굳이 왜 그걸 찾아 들어야 하나?' 수준의 존재들이다. 그나마 BTS는 의외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이 7명이란 것과 몇몇 멤버의 이름을 알 뿐 얼굴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걸그룹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어, 저 친구들이 뉴진스인가?" 하는 정도는 되니까. 한동안 의지적으로(인간은 의지의 동물이다) 트와이스까지는 팔로잉을 했는데, 어느 순간 그것도 놓아버렸다. 그나마 르세라핌은 '도도독' 영상 보고 알았고(맞나? 맞는 거겠지?), 아이브는 지구 오락실 덕분에 친구가 갑자기 안유진 씨 팬이 되면서 건너건너 알았다. 그 외 다른 그룹은 솔직히 이젠 구분 못하는 지경이다.
중학교 때 이후로 안경을 쓰고 살았으니 눈은 원래 나빴는데, 전자책을 못 보는 건 눈 탓이 아니라 그냥 기분 탓이다. 몇번 시도했는데 잘 되지 않는다. 책은 이상하게 종이책이어야 마음이 편하다. 심지어 혼자 보고 쓰려고 만드는 자료도 출력본을 봐야 기분이 안정이 된다. 모니터 안에만 떠 있으면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금방이라도 누가 접속해서 내용을 막 바꿔놓을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타래에 올리는 글들은 스마트폰에 미리 내용을 메모하고 그때그때 쓰고 고치고 하면서 하나하나 완결을 짓고 있지만 이건 그나마 한편에 길어도 A4 두 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니까 그게 가능한 거지, 조금 긴 이야기를 하고자 하면 난 일단 노트와 펜을 꺼내야 한다. 지구에겐 무척 미안한 일인데 무의미한 단어들이 나열되고 파지가 여러뭉치 쌓이고 한참을 끙끙거리고 나서야 생각의 줄기가 그나마 잡힌다. 여전히 책상 위와 책장 서랍엔 그렇게 만들어진 이상한 메모들이 한가득이다.
어쩌면 생각을 유튜브나 틱톡 쇼츠가 아닌 이런 공간에 글로 주절주절 길게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무척 낡은 방식 아닌가 싶기도 하다. 조카 아이들은 일단 화면을 보면 터치부터 하고 본다. 아기 때부터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에 익숙해져서 그게 당연한 줄 안다. 이건 거의 100퍼센트인데 요즘 중학생만 되어도 전화기 이모티콘이나 디스켓 저장 이모티콘 모양이 왜 그렇게 된 건지 알 수나 있을까? 심지어 이젠 CD도 안쓰는데.
결정적으로 난 스스로의 정체성을 '기독교인'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무신론이야말로 현대인의 필수 교양같은 시절과 발맞춰 사는 일이 애초에 가능한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면 진짜 정통(?)으로 믿는 분들이 '너 술도 잘 마시고, 요즘 교회도 잘 안나가고, 활동도 거의 없고 그러지 않니?' 하시겠으나...
가끔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가 요즘들어 더더욱 웃음에 집착하는 게 혹시 나이를 먹는 탓일까? 이렇게 쓸데없고 맥락없는 개그나 날려놓고 나 혼자 웃기지 않느냐고 강요하는 꼰대가 되어가는 것일까? 그리 생각하면 문득 서글퍼진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도리어 어릴적엔 나 혼자 다른 시간을 산다는 것에 그다지 두려움이 없었다. 일단 난 휴대폰이 없었다. 사람들이 다 물었다. 불편하지 않느냐고. 있다 없으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내 경험상, 휴대폰이 없는 당사자보다 그 주변 사람들이 더 불편하다. 난 괜찮은데 친구들은 답답해서 죽으려고 했다(아니면 죽이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시절이었으니 업무가 시급한 것도 아니고, 동선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가끔 휴강 공지를 받는 게 어렵긴 했지만 어차피 내 대학생활이란 게 늘 뜬구름 밟는 것마냥 반투명 상대로 부유하며 수업이 있든 없든 그냥 보고 싶은 책 보는 게 전부(??)였으니까.
지금도 사실 업무를 제외하면 휴대폰이 필요한지는 조금 의문이긴 하다. 만약 지금의 일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하면 휴대폰을 없애보는 건 어떨까? 하지만 이젠 없앨 용기까지는 없지 싶다. 핑계는 많다. 사진도 찍어야 하고(지금도 전화기에 딸린 사진기 노릇을 가장 많이 하니까) 어찌되었든 이제 큰조카님과 통화도 해야 하고, 나이먹은 친구들이 예전처럼 내가 연락이 안되는데 너그러움을 발휘해주지 않을 거니까(이젠 분명 죽이려고 할 테니까).
모두들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고 싶어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귀한 게 무언지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시간 아닐까 싶다. 내 차를 대신 운전해주는 사람의, 내 음식을 대신 만들어주는 사람의, 내 스케줄을 관리해줄 사람의, 내가 채우지 못할 부분의 지식과 열정을 동원해 줄 사람의 시간을 돈으로 사는 거다. 그렇게 남들의 시간을 모아서 내 지금을 어쩌면 그 누구의 지금보다 더 빠르게 앞세우고 싶은 게 인간의 욕망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맨 앞에 선 시간이 가장 가치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난 여전히 종이책을 뒤적거리는 그 느린 시간이 행복하고 영화관에 가서 광고를 보면서 멍 때리며 흘리는 시간도 행복하다. 가끔은 오래된 판본을 잃어버려서 더는 그 번역자의 목소리로 들을 수 없게 되어버린 옛날 소설이 그리울 때가 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최신곡을 카세트테잎에 녹음해서 모은 다음 라벨을 소중하게 적어 건네주고 받을 때의 그 설렘은 이제 여기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빨리 가는 시간이 뒤돌아보며 속터져 하면서 '그렇게 늦게 오면 진짜 죽는다'고 협박을 해도 먼저 가라고 귀찮은 표정(변희봉 선생이 괴물에서 보여줬던 그것보다 조금 더 나른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을 수는 없을까? 그러다간 언젠가 정녕 뒤떨어져서 아예 손 쓸 수 없는 지경이 오려나? 그러면 진짜 친구 따라다니며 낚시라도 배워서 먹고 살 가장 원시적인 기술이라도 확보해둬야 하려나?
모르겠다. 그때가 되어도 어떻게든 살 길은 생기기 마련이겠지. 그냥 그 때나 지금이나 조금이라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웃기는 사람이고 싶을 따름이다. 웃음은 모든 걸 너그럽게 만드니까. 빠른 시간도 느린 시간도 웃음 속에서라면 모두 잠깐 나란히 앉아 쉴 수 있을 테니까. 늘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