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소품집 17

by 헤비

모든 관계는 적정한 거리 유지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말그대로 '관계'니까 기본 세팅 자체가 '나'와 '너'다. 그리고 '사이'가 존재한다.


우리가 너무 붙어버리면 '사이'가 사라지고 심지어 '나'도 '너'도 깨어질 수가 있다. 무른 쪽은 깨어져 사라질테고, 단단한 쪽은 외로워질테지. 그렇다고 안전하기 위해서 너무 멀어지면 그때 역시 문제가 생긴다. 혹여나 시야 안에 있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다면, 그래서 저기 있는 점이 '너'인지 '그'인지 아니면 '누군가'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면, 그건 이미 우리가 서로를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모든 관계가 같은 적정 거리값을 갖진 않는다. 당연히 애인의 사이라면 늘 서로의 살냄새를 그리워 할 정도로 밀접하겠지. 하지만 친구라면 그것보단 멀테다. 엄마와 아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밀접한 관계였다가 점점 멀어져가며 아이가 또 하나의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는 게 당연하고도 꼭 필요한 일이다. 무언가를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잠시간은 한 쪽이 종속되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작은 쪽이 언젠가 제 궤도를 찾아나가지 못하면 실패한 관계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사실 세상 많은 문제가 그렇지만, 이 관계의 적정 값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게다가 어떤 측면에 있어서는 같은 관계도 값이 조금씩 오락가락 한다.


때로 우리는 부모에게 못할 말은 물론이고 심지어 배우자에게 못할 말도 친구에겐 하는 경우를 본다. 이럴때 그 친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들어주는 대나무숲 같은 느낌이라 거리값이 일시적으로 가까워지는데, 그렇다 한들 이 친구가 "난 너에게있어 네 부모나 네 배우자보다 더 가까운 존재야."라고 주장하면, 제정신이 아닌 거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는 친구의 거리로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


거리값을 서로 다르게 매기는 경우도 많다. 나는 분명 처음부터 친구보다는 가까운 위치에 널 뒀는데, 너는 친구들 사이에 나를 두고 혹여 내가 한 발만 더 앞으로 오면 달아날 준비부터 한다. 그래놓고 가끔씩 다른 친구들에게는 원하지않는 '대나무숲' 노릇을 내게만 해달라고 한다. 내 안에는 너의 비밀들이 차곡차곡 쌓여감과 동시에 거리를 왔다갔다 하는 피로감도 쌓여간다. "이럴바에는 차라리 조금 더 가까이 놓아줘."라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반대도 있다. 난 당연히 네가 '지인'이상은 들어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마음껏 거리를 확보해둔다. 그런데 너는 적어도 그것보다는 한두 발은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한다. 아직은 안전거리가 꽤 있지만 그 방향성이 날 당황하게 만든다. 미리 다가오지 말라고 선을 그어야 하는가, 아니면 내가 정한 선을 네가 넘을 때 그때 손을 들어 거기까지라고 외쳐야 하는가?


가끔은 장난치듯 선을 살짝살짝 넘나드는 사람도 있다. 좋은 말로 그만하라 타일러도 이미 제멋대로 궤도를 그렇게 잡아버려서 결국은 내가 못견디고 멀리 던져버린다. 그러면 상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은 호의일 뿐이었다고, 내가 오해를 한 거라고, 내가 이상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일단 다가오면 무조건 반겨주기도 한다. 자신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하늘이 준 은총이기나 한 것처럼. 정말 해맑게 웃고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온 몸이 예전 지나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상처투성이다. 이상하게 마음 한 귀퉁이에서 작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어렵다. 내가 가서 그 아이를 달래줄 수 있을까? 아니면 나도 결국 부딪혀서 그의 상처를 또 하나 늘려놓고 떠나게 될까?


아주 몇몇은 나처럼 처음부터 외딴 섬이 되는 편을 택하기도 해서 가끔 오가는 등대지기 같은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멀리 돌아가는 궤도를 정상궤도로 만들어둔다. 안 외롭냐고? 그럴리가. 하지만 대신 머리 아플 일은 많이 없다. 매일 노을이 지고, 적막은 갈매기가 쫓고, 그 갈매기는 고양이가 쫓아다닌다. 그 일 말고는 고요하니까 책 볼 시간은 많다.


정말 가끔은 네가 자연스레 나의 '너'가 되었듯 나도 너의 '너'인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내가 바라보는 너의 궤적이 도통 어떤 그림인지 몰라 가만 관찰해보면 나는 너에게 처음부터 '너'인 일 조차 없었다는 걸 깨닫는 경우도 있다. 나 혼자 우리인 줄 알았다가 나 혼자 멀어지고 나 혼자 한숨 쉬다 부딪힌 적도 없이 아파하며 이 거리를 서둘러 지워야 한다.


그리고 때론 조용하고 아무런 울림도 없이 그저 사소하게 다가와놓고서 어느 순간 나도 몰랐던 바로 뒤나 옆자리에 자리잡고 갑자기 커다란 의미로 빛나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정말 속수무책이다. 이런 사이에서는 거리조절 자체가 불가능해서 그저 상대의 처분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갑자기 뜬금없이 이게 다 무슨 이야기나고? 성시경의 '거리에서'를 듣다가 생각난 이야기들이다. 미안하다. 처음부터 뭔가 거리를 잘못 재고 쓴 글 같다.


난 가을 날 덕수궁에서 시작해 정동길 따라 프란체스코 교육회관까지 이어진 거리를 걷는 걸 가장 좋아한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나 이소라, 이승환, 김동률의 발라드넘버 아무거나 귀에 꽂고 걸으면 그야말로 이러려고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무척 좋다. 교육회관 1층 카페도 무척 좋아했었는데 하도 간지 오래 전이라 아직 그대로인가 모르겠다. 그냥 이런 좋아하는 거리 이야기를 해 볼 걸 그랬나? 그건 왠지 언젠가는 따로 할 일이 있지 싶어서 남겨두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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