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빠는 슬리퍼가 아닌데

소품집 18

by 헤비

애초에 난 문학이나 국어 관련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글을 쓸 때면 늘 불안불안하다. 기본적인 주술관계가 맞는 건지, 이 단어가 여기 쓰이는 게 맞는 건지, 내 문장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은 되고 있는 건지 나로서는 확신이 없다.


아예 포기하다시피 한 게 있다면 바로 '띄어쓰기'다. 단어는 가끔씩 찾아보기도 하고 수정을 거치지만 띄어쓰기마저 매번 찾아보려 하면 아예 글쓰기를 포기할지도 모르지 싶다. 나름 찾아본다 하고 고민을 한다 하지만 아마 이 글 하나 안에서도 빨간 펜을 긋기 시작하면 무시무시한 붉은 물결이 넘실거릴 테다. 띄어쓰기 만큼은 정말 '에라 모르겠다.' 심정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혼자 속으로 읊어대는 습관이 있는데, 이게 나쁜 습관이어서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특히 읽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톤과 템포로 읽어줄 리가 없다. 그러다보면 내 딴엔 농담이라고 한 말이 갑자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또 심각하고 서글픈 감정을 담아 쓴 글을 보고 누군가는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라고 할지도 모른다.


요즘은 쓸 수 있는 단어들도 점점 줄어든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이건 문제가 있어요.' '이건 차별적 요소가 있습니다.' '이건 너무 왜색이 짙지 않나요.' '이건 요렇게 순화시켜보기로 하죠.' 라며 없애고 바꿔댄다. 이 흐름 자체는 어쩔 수 없다. 또한 일부러 누군가를 비하하는 요소가 가득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단어를 쓰는 건 조심해야 하고 한참 고민해봐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단어들이 점점 오염되어가는 것도 심각하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었던 단어에다가 말도 안되는 밈을 쑤셔넣고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는 문제아들이 꽤 많다. 그러다보니 이게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인지 아닌지 검열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글을 올릴 수가 없다.


그런데 난 그렇게 휴지통 속에 들어가는 단어들이 아쉬울 때가 많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그녀'다. 꼭 '그'와 '그녀'를 나눠 쓸 이유가 없다는 데는 동의한다. 문맥상으로 충분히 '그'가 간결하고 때론 건조함도 확보할 수 있어서 좋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난 단순하게 '그녀'가 가진 울림을 너무 좋아한다. 물론 누군가가 '그녀' 안에 담긴 울림과 아련함이 성차별적인 거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난 그걸 감수하고도 좋다는 거다. 영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가 알듯 모를듯 한 미소를 지으며 줄리아 로버츠를 바라보는 표정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하고.


이건 누구나 동의할 거라 믿는데, 쓰레빠는 슬리퍼가 아니다. 쓰레빠는 일단 신는 게 아니라 끄는 거다. 어느 순간 윗부분이 떨어져 대왕조개처럼 입을 쩍 벌린채로 저 혼자 바닥에서 떨어지길 거부하거나, 밑창이 반쯤 금이 가 툭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게 쓰레빠다. 쓰레빠는 원래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 태어나서 쓰레빠가 망가진들 그 일에 아쉬워하는 사람 하나 없이 늘 담백하게 버려진다. 쓰레빠에는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아름다운 뒷모습이 있다.


슬리퍼는 맨 바닥이 아니라 카펫 위를 오가야 할 것 같다. 굳이 바닥을 밟는다면 대리석 쯤이 괜찮다. 아니면 슬리퍼는 몇 년을 신어도 고무 재질이 딱딱해지거나 갈라지지 않는 정품을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원래 쓰레빠는 시장에서 세 켤레 묶어 얼마에 파는 것이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아예 태생이 다른 놈들이다.


밤새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부스스해진 머릴 긁어대며 새벽 길에 나선 윗집 백수 형의 발에는 슬리퍼가 아닌 쓰레빠가 어울린다. 그 형이 슬리퍼를 신는 순간 백수노릇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유산이 넉넉해서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한 갈래에 불과해진다. 쓰레빠를 끌어야 '저 인간이 정녕 생각도, 대책도 없구나' 싶어진다.


왜색 짙은 언어들이 우리 말로 바뀌는 건 꽤 좋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 대상이 꼭 '일본'인 것은 반쯤은 동의가 되고, 반은 동의하기가 힘들다. 나도 가만보면 안되는 영어 무지하게 섞어 쓴다. 어느 순간 습관처럼 쓰는데 콩글리쉬인 경우도 태반이다(물론 콩글리쉬도 결국 언젠가는 영어의 한 정식 범주로 편입이 될 수도 있겠으나). 충분히 쓸만한 우리 말을 두고 일부러 벤또, 와리바시, 스메끼리를 쓰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신 같은 문제의식을 다른 외국어, 특히 영어에도 느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아예 대놓고 쓰는 욕설과 비하어는 어떠할까? 특히 장애인을 두고 옛날에는 흔히 쓰던 단어들을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다. 하지만 어떨 때는 동원되어야만 하는 경우도 분명하게 있다. 올바른 예시라고 생각은 하지 않지만 성경에는 바디매오라는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번역본에 따른 차이를 보면 이렇다.


요한복음 9장 1절:

[개역한글]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개역개정]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소경이란 단어는 비하의 의미가 있다고 보아 맹인으로 바뀌었는데, 어쩔 수 없고 잘 바꾼 거란 걸 알면서도 난 못내 아쉬운 부분이 있다. 결국 저 이야기에서 바디매오는 예수님에게서 치유를 받는다. 그런데 그 직전에 제자들이 묻는다. "예수님, 저 사람이 눈 먼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즉, 그들은 바디매오가 일단 죄인이라 낙인을 찍는다. 바로 차별과 비하의 대상이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장애 뿐 아니라 차별과 비하 속에서 그를 건져내신다. '맹인'보다 '소경'이 더 어울리는 상태였다는 말이 된다.


욕을 써야만 했던 시 한 편을 보자.


곱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휜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핥아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김중 詩 「사랑」


전체적으로 욕이 난무하는 난장판이 아니지만 초반 딱 두 줄의 씨앙놈과 비엉-신이 (그것도 꼭 쌍놈과 병신이 아니어서 다행인) 시 전체를 눈물겹게 만든다. 씨앙놈은 나가서 '뒈져'야 하는 거고, 비엉-신은 육갑을 떨'고'가 아니라 떨'구' 자빠져야 한다. 이건 필연이다. 이 필연의 굴레에 눌린 사랑이 서글프면서도 왜 이리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지...


난 모든 언어가 조금은 자유로워지길 소원한다. 무작정 그러자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용납할 공간은 열려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와 그가 만나도 좋다(여기서 두 '그'의 성별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러나 난 그와 '그녀'가 만나는 언어의 공간도 닫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 같은 부류는 슬리퍼를 신어 볼 역사가 없다. 평생 쓰레빠 끌고 다니는 거다. 친구들과 어디서 시덥잖은 농담이나 하며 놀다 돌아와서 모니터 앞에 서면 괜히 그럴싸한 척 이런 글을 쓰는 거다. 발가락으로는 쓰레빠를 툭툭 건드려가며 참 대책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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