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의 경우 다들 스무살 무렵이나 늦어도 스물 다섯 이전에는 운전면허를 땄는데, 난 그보다 한참 늦게 면허를 땄다. 주변에서 가끔 "이제 너도 면허를 따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들었는데, 그때마다 난 "조만간 자율주행의 시대가 오게 되어있고, 당연히 운전이란 기술은 하등 쓸모가 없어지게 될 터인데 내가 그걸 굳이 노력해서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대답했다.
그게 그저 말을 돌리는 식의 핑계였으면 주변에서도 '웃기지 마라' 했을텐데 내 눈빛이 워낙 확신에 차 있어서 그랬는지 친구들은 '저 쓸데없이 입만 산 새끼를 우리가 입으로 이기긴 어렵다'는 표정을 짓곤 했더랬다. 그러나 내 고집도 결국 꺾이고 말았고, 지금은 운전하는 걸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운좋게도 나름 앞선 기술의 혜택을 받기 좋은 나라에 태어난 까닭인지 세상 돌아가는 데는 크게 뒤쳐지지 않은 채 살고있긴 한데, 그 탓에 우리는(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모든 기술이 제대로 나오기만 하면 '바로' 실생활에 적용될 것만 같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건 착각에 가깝지 싶다.
어릴적 소년신문 과학면에는 '2020년의 생활상'에 대한 기사가 가끔 실렸다. 2020년이면 밥 대신 캡슐을 삼키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들이 빽빽하게 시야를 뒤덮고, 휴대용 주택이 나오고, 기분에 따라 옷 색깔이 변하고, 가상현실 속에서 통화를 하고, 달나라 여행이 활성화 될 거라 했다. 그런데 그나마 가장 비슷하게 맞춘 건 스마트폰 밖에 없다.
기술의 진보 속도가 생각보다는 느린 탓도 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실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인간이 무척 보수적인 동물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걸 느낀다. 잘못하면 나처럼 괜한 고집으로 운전면허를 늦게 따게 될 수도 있다.
이미 영양제와 몇몇 밀키트만으로도 충분히 간편한 식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술을 내게 극단적으로 적용시킬 건가를 생각하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기계로 음식을 만드는 게 균일한 맛을 보장한다고 해도, 그보다 더 들쭉날쭉할 수 밖에 없는 요리사의 음식이 더 끌린다. 시간을 보는 거야 내가 쓰는 스마트워치 같은 전자시계류가 정확하긴 하겠으나 스위스에서 장인이 톱니바퀴 하나하나 깎아서 만드는 시계가 훨씬 비싼 걸 우리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언젠가 (내가 이때쯤이면 올 거라고 믿고 있다가 틀렸던) 그 날이 오긴 올 거다. 자동차 자율주행도 현실화될 거고, 집마다 간단한 음식은 알아서 조리가 되는 자판기 같은 모양의 기계가 놓일지도 모른다. 수직농법 회사들이 아직까지 이문을 남기진 못하고 있지만 환경오염 때문에 언젠가 우리가 먹는 야채, 채소들의 대부분은 실내에서 자라는 게 당연한 시절이 올 수도 있다.
특히나 AI의 발달은 인간의 사회를 놀랍게 변화시킬 거다. 아직 초기모델에 불과하지만 이미 몇몇 분야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AI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 알파고와 이세돌이 대국을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당연히 이세돌의 완승을 예상했다. 체스는 그 수가 한정적이지만 바둑은 무한대에 가깝고, 수순의 묘가 존재하기에 그걸 알파고가 따라잡기엔 무리라는 관측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섬뜩했다. 이제 프로 바둑기사들은 누가 더 AI처럼 둘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하는 중이다.
우리가 흔히 예술직종이라 불리는 문학, 미술, 음악 같은 류는 영향을 안받을까? 아니, 이미 AI가 서서히 침투를 시작했다. 어떤 공모에서는 'AI를 사용한 작업은 배제시키겠다'는 공지라 붙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아쿠타카와 상 수상자가 스스로 5%정도 AI가 쓴 문장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걸 밝히기도 했다. 미술계에서는 이미 화가는 작품 컨셉과 여러 아이디어는 제시하고 정작 작업은 다른 사람이 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하는데, AI가 탑재된 기계가 미술작품을 실행하는 것을 어디까지 용인해야 할지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한다.
AI가 일반화되게 된다면 지금 존재하는 직업의 90퍼센트 이상이 사라질 거라고 하는데 이 이후의 일들을 두고 의견은 꽤나 많이 갈린다.
산업혁명 이후로도 러다이트 운동이라며 기계를 부수는 운동이 일었으나 도리어 사람의 일자리는 늘어난 것처럼 AI와 기계가 현재의 노동을 다 빼앗아가도 결국 일자리는 늘어날 거라서 사람은 여전히 무언가 일을 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특히 많은 부분에서 도태되어있는 후진국의 경우에는 AI를 통해 전보다 더 나은 교육, 의료, 행정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대로는 그때의 기계와 지금의 AI는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모든 일자리에서 도태될 것이며, 몇몇 AI 소유자만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되고 절대다수의 인간은 가치를 잃어버린 잉여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상도 있다. 그럼 그때 인간은 스스로의 가치를 어떻게 변호하게 될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또 다른 쪽에서는 인간이 대부분의 일자리에서 도태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정치와 타협을 통해서 생산물이 공정하게 분배될 수 있으며 그때부터 인간은 노동에서 해방된 완벽한 소비자로서 존재하게 될 거라는 유토피아적 예상을 꺼내놓기도 한다.
마지막 예상이 현실이 된다면 아마 인간은 어찌보면 지금과는 완벽히 다른 존재적 신분을 갖게 될 텐데, 그런 세상을 꿈꾸는 건 솔직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따져놓고 보자면 100여년 전 이 땅에 살던 선조들이 자신의 후손들이 '맛이 별로다'는 이유로 케이크에서 크림을 덜어내고 먹고, 양반네들이나 마시는 가베를 물 마시듯 퍼마시게 될 거라 얼마나 예상을 했겠나. (친척분들이 오신다고 아버지가 케이크를 사오셨는데 솔직히 마음에 안든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를 '충실한 소비자'로 마음을 미리 세팅해두는 게 크게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시대의 흐름은 인간이 소비자로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준비하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회 분위기는 우리가 뭔가를 매순간 생산해내지 않고 있으면 낙오되는 것마냥, 한 순간이라도 떠밀리면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버릴 것마냥 몰아가는 거 같다.
생물시간에 배웠듯이 인간은 '소비자' 중에서도 '최종소비자' 그 중에서도 거의 '찐막 최종소비자'에 속한다. 우리가 만드는 생산물들이라고 해봐야 결국은 인간에게 소비되기 위해 존재한다. 반려동물 용품마저도 생각해보면 그걸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는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해야 할 테니까.
우리는 아무리 팔을 벌리고 햇살 아래 선다 해도 광합성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은 결국 누군가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는 존재고, 시간의 대부분을 무언가를 소비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나란 존재가 원래 최종소비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진다.
난 책을 보는 시간에도 '이럴 시간에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하는 거 아냐'라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래서 책도 생산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책 뿐만이 아니다. 영화를 보든, 음악을 듣든, 미술관에 가든, 좋은 카페를 가거나 멀리 여행을 가도 이걸 어떻게든 생산으로 연결시켜야 한다는 묘한 조바심이 났다.
올해 1월에만 딱 20권의 책을 봤다. 작년 9월부터 12월까지 넉달 동안 본 책도 약 60여권이 되니까 얼추 한 달에 열다섯권이 넘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접었다. 시간이 되면 무작정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사실 그만큼을 읽고 보려면 생산적인 일을 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체력에는 불가능이다.) 아예 밸런스 같은 걸 놓아버렸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소비를 생산에서 제대로 독립시키고 나니 이제와 뭔가 다시 글을 쓸 힘이 생겼다. 소비하는 순간만큼은 집중적으로 제대로 소비해야 한다는 감각이 이제야 조금 만들어진 거 같다. 커피를 마실 때는 커피에 집중하고, 책을 볼 때는 책에 집중하고, 영화를 볼 때는 영화에 집중하는 게 맞다. '이걸 어디에 써먹어야지'가 나와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순간을 영원에 연결시키고 싶어한다.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고, 시와 소설을 쓰고, 인문학적이나 철학적인 이론체계를 완성하고, 멋진 리듬과 선율을 만드는 등, 그렇게 무언가 가치있는 것을 생산하려고 하는 욕망을 가진다. 그런 욕망의 낙서들은 내 마음 벽에도 빼곡하게 적혀 있다. 지울 생각 없다. 내가 한 일들 중 그나마 좋은 일이라 믿는다.
하지만 결국 그 일도 내가 매 순간을 완벽하게 소비 한 뒤에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이제 어렴풋이 한다. 생산은 가끔 특별하게 되는 일이고, 소비는 우리가 매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 이유다.
개인적인 계획에 따르면 당장 써야 할 원고가 밀려있지만, 이러다 며칠밤을 새도 도저히 마감을 맞출 수가 없을 것만 같지만, 커피를 들고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석촌호수가를 거니는 건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소비하기 위한 최종소비자로서의 나의 용기다. 핑계 아니고, 용기다. 글은 오늘 혹은 내일 저녁의 내가 쓰겠지. 그때의 나 녀석 부디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