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펼쳐보지 않을 거라면 왜 적었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어 일기장을 펼쳤다. 이건 그 안에 담긴 문장들이다.
분명 일기니까 내가 적었지만, 내가 보아도 낯설다.
문장도 묻어두면 발효가 되는 걸까.
[2022년 5월 15일. 맑음- 꽤나 푸르름]
일기를 쓰는 일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일단 난 글로 먹고 사는 일을 꿈꾸기에 일기 쓸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한 글자라도 글을 거기에 쓰는 게 맞지 싶어진다. 그리고 또 나란 인간이 참 별 일이 없어서, 매양 일기를 쓰겠노라 생각은 해도 막상 쓸 말이 없다. 게다가 또 일기를 어디까지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내 삶의 경계는 어디이며, 어디서부터는 그저 그럴싸하게 꾸며놓고 있는 것일 뿐이고, 어디는 어림짐작이며, 어디는 또 꽁꽁 숨겨두고 있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기를 써보겠노라 생각한 건 다 유퀴즈에 나온 박보영 씨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는 날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였다'고 적어둔다고 하는 이야기가 큰 용기와 위로를 줬다. 그래, 그래도 괜찮은 거구나.
실제로 인생은 무료한 하루를 못견뎌 하다가 그 무료한 하루가 갑자기 꽤나 비싼 '유료'임을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이 괴로와 도로 그걸 잊고 무료해지려고 발버둥치는 어리석은 일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커피를 내리고 혼자 점심을 먹고 메시지 성경을 읽고 야구를 조금 보다 기아가 이길 것 같지 않아 장어구이에 찍어먹을 데리야끼 소스를 사러 차를 몰고 마트에 갔다. 기아는 역시나 졌고, 그로 인해 하이라이트 필름 볼 시간을 꽤나 아낀 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초고 4페이지 쯤 쓰자 오후 11시가 되었다.
소설을 쓰는 일은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여전히 이걸 삶의 방편으로 삼고 싶은 마음처럼 미련한 게 있을까 싶다. 난 정식으로 소설을 배운 적이 없다. 고작 흉내내기에 불과하다. 문자가 만드는 효과와 작동방식은 너무 섬세하고 체계적인 것이라 흉내내기로는 따라갈 수 없는 어떤 경지가 있는 것 같다. 난 늘 벽에 머릴 찍고 있는 딱다구리마냥 언젠가는 되겠거니 하고 있지만, 실로 부족함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다는 데 있다. 쓰다보면 느껴지는 어떤 쾌감만은 진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나머지는 무엇인가?
신앙의 문제에 있어 난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이 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십자가에서 나는 더 이상 물러설 퇴로를 잃고 말았다. 난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이 결국 내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이게 어떤 의미에서는 참 막연하다. 정말 모르겠다. 그러나 언젠가 분명히 알게 해주실 날이 있을 것을 믿는다. 기도한다. 어느 순간 듣기만 하던 그 날이 내 눈 앞에 펼쳐질 것을 믿는다. 그날에 나의 최선이 무엇이었는지, 하나님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다 분명히 보아 알게 될 것을 믿는다.
훌쩍 여행을 가고 싶은데 혼자는 싫다. 같이 갈 그녀가 있으면 좋겠다. 그녀가 재즈와 커피를 좋아하면 좋겠다.
[2022년 5월 24일. 올해 여름 덥다는데 걱정이 많다]
요즘 완전 슬럼프다. 웃음이 안나온다. 일 때문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번아웃 같기도 하고, 뭔가 사람이 좀 멍하다. 감정의 우물이 말라가는 기분.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무신경해진다는 거, 스스로가 왠지 작고 못난 뿔을 달고 사는 기분이다.
[2022년 6월 3일. 여름으로 조금씩 끌려들어가는 중]
나비는 번데기 안에서 걸쭉한 수프가 되었다가 완전한 재배열을 거친 후에 나온다고 한다. 애벌레의 살 속엔 날개의 DNA는 있어도 날개 그 자체가 차곡차곡 접혀있는 건 아니다. 번데기에서 유전자 수프 형태가 되었을 때 그 이전 애벌레 상태일때 가지고 있던 에너지의 약 80%를 잃는다고 한다. 지금의 나에서 내가 꿈꾸는 나로 완전변태를 하기 위해서는 나도 내 모든 것을 일단 녹여야 한다. 그리고 이후에 잃을 것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그러한 상실에 익숙해져서 무덤덤해지거나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유리하지만, 번데기를 찢고 나갈 힘이 모자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에서는 문제다.
멀리 있어야 하는 건 멀리 있어야 한다. 제자리는 참 중요하다.
[2022년 6월 6일. 새벽에 비오고 갠 후 하늘이 하루 종일 너무 예뻤다]
어떤 의미에선 하루가 어떤 의미를 꼭 가져야 할 필요가 있나? 그런 강박이 더 문제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도 매번 의미가 없어서 될 일인가 생각한다.
허투루 보내기에 지금은 내가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일기는 생각나는대로 마구 적어서 문장이 너무 쉽게 무너진다.
쉬어도 쉬어도 더 쉬고 싶다. 쉬어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상태일 때에야 마음이 쉴 수 있지 않을까? 쉬어도 아무 문제 없는 상태여야 어쩌면 더 일을 열심히, 잡념도 두려움도 없이 일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겐 쉼이 없다. 벼랑 끝에 로프 한 줄 걸고 거기 의지한 텐트에서 자는 쪽잠같은 쉼. 이건 진짜가 아닌 거 아닐까?
[2022년 6월 22일. 본격적으로 덥다]
마음의 메트로놈을 늦추고, 우선순위를 제대로 맞추면 그래도 삶이 확실히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되지 않는 건 그런 탓 아닐까?
일기라고 적는 게 온통 '해야겠다'와 '하고 싶다' 밖에 없다. 소소하게라도 '해냈다'의 기록이 있으면 좋겠다.
[2022년 6월 23일, 12시 조금 지나서부터 비가 미친듯 내렸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차를 타고 퇴근하는데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올려도 앞이 보이질 않았다. 쏟아붓는 느낌. 안그래도 가물다 했는데 그 많은 물이 어디서 온 것일까? 하늘이 보기에 그건 많은 물이 아닌 것일까?
일을 하다보니 '내가 나를 지킨다'는 의미로 사람을 친절하게 대해야지, 상대의 반응을 바라면 안되겠다 싶다. 하지만 생각만 그렇지 역시나 사람에게 최고도 사람, 최악도 사람이다. 난 아무래도 사람을 덜 보는 일을 하며 살고 싶은 쪽이다.
[2022년 6월 29일. 이번주 내내 비. 그래도 어제보단 바람이 덜 불었음]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비에 젖은 거리를 걷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조금 더 머물렀다면 혼자 술 한 잔 했겠다 싶을 정도였다.
[2022년 7월 1일. 예보는 비, 하늘은 맑음]
어제까지 내리부었던 비를 보면서 '이 많은 물이 어디 숨겨져 있었던 걸까?' 했기에 또 비가 온다는 말을 의심하지 못했는데 하늘은 놀리듯 맑다. 그 많던 물이 이번엔 어디로 도망친 것일까?
그런 마음일 때가 있다. 바다에 가면 이 하얀 종이를 손쉽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책상 위를 말끔하게 치우면, 새 연필을 집어 깔끔하게 깎아 놓으면, 따뜻한 커피를 내려 그 향을 가슴에 한 모금 한 모금 음각하듯 새겨놓은 다음이라면... 그러나 바다는 멀고, 책상을 치우는 노동도 사람을 지키게 하고, 안 쓰던 연필을 써보겠노라 칼을 들다간 손이 다치기 마련이다. 잉크처럼 까만 커피 속에도 글자가 담겨있는 게 아니다. 이제야 안다. 하얀 종이를 채우는 건 그냥 대가리를 종이에 들이박는 거 말고는 답이 없다는 걸. 계속 부딪히고 부딪혀야 한다. 다른 이유나 상황을 계기로 삼아보려는 건 솔직히 그렇게라도 이 하얀 종이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핑계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이 그런 방식으로 작동할 때가 있다. 오늘 내가 견뎌야 할 삶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널 생각한다. 네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안다. 그 자리에 꼭 '너'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너여야만 하는 게 아니다. 이건 그리움이 아니라 도피다. 그때 넌 찬바람 부는 겨울 산의 산장이나, 높은 파도가 이는 바닷가의 안전한 커피숍 같은 곳이 아니다. 그냥 폐허다. 네 탓이 아니다. 내가 네 안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너는 폐허가 된다. 왜 우리는 마주보고 있어도 외로운가. 폐허에 스며든 모든 바람에 서글픔이 묻는 일은 사실 당연하다.
[2022년 7월 11일. 대구를 지나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설을 안 써도 그만이다. 일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거나 미룬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다. 성경 한 줄을 읽는 게 큰 기적의 시작점이 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꾸준하게 운동을 하거나 생활습관을 바꾸는 건 차라리 일시적이나마 효과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일들은 늘 '안해도, 그냥 지나가도, 미뤄도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일'의 범주에 들어가 있다.
사람도 사실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인 경우가 너무나 많지만, 진짜 소중한 사람은 날 이해할 거란 이유로 자꾸 만남을 미룰 수 있지만, 만나야 한다. 그게 맞다.
나는 만나고 싶은 사람일까? 만나야 하는 사람이긴 할까? 그건 모르겠다. 그런 쪽에는 영 자신이 없다.
[2022년 7월 12일. 흐리지만 바람이 좋다]
수학적으로는 1+2나 2+1이나 답은 3으로 동일하다. 하지만 인생은 1 다음 2가 오는 것과 2 다음 1이 오는 것이 늘 같은 3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순서가 맞아야 할 때가 의외로 많다. 우리가 속는 것은 이 순서가 틀리기 때문이다. 삶이 이해보다 먼저 온다. 그렇다. 이해하고 사는 인생은 없다. 책임이 먼저고 선택은 나중이다. 선택한 것만 책임지고 사는 인생은 없다. 늘 이렇게 순서가 뒤바뀌어 알고 있다. 고통은 늘 무엇보다 빠르게 다가온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이 싫어지지만, 동시에 사람은 사람에게서 쉰다는 단순한 진리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2022년 7월 19일. 잠깐 소나기 내렸으나 나름 쭉 맑았다]
인간은 성급해서 낙원에서 쫓겨났고, 나태해서 낙원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프란츠 카프카-
[2022년 8월 1일. 가끔 비가 내렸지만 열기에 더 후텁지근하기만 했다]
자다가 덜컥 담이 와서 한참 편한 자세를 찾아보려 했으나 안되더라. 결국 한 시간 넘게 뒤척거리다가 겨우 다시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엄마가 와서 파스를 붙여줬다. 그런데 그 순간 '이제 됐네, 파스 붙였으니 됐네.'하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다 아침에 다시 팔이 아파 일어나려는데, '아 아까 그게 꿈이었구나' 싶은 거다. 희한했다.
[2022년 8월 2일. 오늘은 비가 조금 더 왔고 바람도 불었다]
진짜 비극은 스스로 만든 구렁텅이, 미로,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거다. 처음엔 그게 잘 사는 것인 줄 안다. 그렇게 자기 발 밑을 스스로 파내려간다. 이때 그 방식이 안통하는 게 낫다. 잘 통하는 게 도리어 저주에 가깝다.
[2022년 8월 5일. 구름만 끼고 더웠다. 비는 안왔다]
친구 둘과 스크린 야구를 쳤다. 내기를 하자기에 '꼴지만 다 내는 거 말고 1등만 면제로 하자' 했더니 다 오케이가 됐다. 당연히 꼴지는 내 몫이니 나머지 둘 중 하나와 돈을 나눠 내겠구나 하고 시작했는데, 24안타 3홈런 15득점의 역대급 스코어가 나왔다. 유레카! 야구는 폼이 아닌 타이밍이었다. 홈플레이트 앞에 공이 오는 타이밍에 맞춰 아무렇게나 냅다 후려갈겨야 한다. 처음 겪는 일. 이걸 꼭 일기로 쓰겠노라 공표했기에 일기로 남긴다.
[2022년 8월 19일. 21일에 생각나서 쓴다. 저녁 때 소나기가 내렸다]
비가 올 때면 지난 수해 때 죽은 세 모녀의 지하방이 떠오른다. 사람이 죽은 지하방을 구경하듯 내려다보던 참혹한 사진도 떠오른다. 누가 이런 시를 썼더라
길 가 창문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지 마라
길 가 창문에서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우리를 불쌍한 듯 내려보지 마라
우리의 마지막을 네게 허락한 적이 없다.
세월호 이후 어떤 바다는 비명과 눈물로 찼다. 이 사고 이후 내게 퍼붓는 비는 또 누군가의 절망과 한숨의 이야기가 되지 싶다. 비를 보고 비를 고즈넉함으로 즐기는 건 그 비에 눈물 흘릴 이가 없을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우린 이제 비를 보고 빗소리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부릴 마음의 공간조차 무너졌다.
[2022년 8월 27일. 오늘 바람은 어떻게 아침부터 하루 종일 사랑스럽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시고는 정작 정확한 '목표지', '도착지'를 알려주시지 않는다. 그렇게 떠나고 헤매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의 가나안에 정착한다. '거기로 가라' 가 아니고 그저 가다가 머문 것이다. 둘은 꽤나 다르다. 어쩌면 처음부터 '어디'가 중요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과정을 거치기만 했다면 머문 그 곳이 어디든 그 '어디'가 되었을 일인지도 모른다. 우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지만 진짜 문제는 '어떻게'다. 끝음과 첫음이 같은 노트를 찍었다 해서 같은 노래가 되는 게 아니잖은가. 음악은 결국 과정 그 자체가 결과다. '어떻게'가 진짜다.
[2022년 9월 8일. 며칠 사이 가장 맑고, 가장 더웠다]
어제와 다른 오늘은 내일 만들어지지 않는다.
[2022년 9월 9일. 날씨는 좋았으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목이 부어있다는 게 느껴졌다. 밥을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났음에도 낫지 않아서 설마하는 생각에 병원을 찾았다. 휴일이라 병원은 닫았으나 약국에서 진단키트를 사서 코로나 검사를 해보니 확진이 나왔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다. 만난 사람도 없는데 어디서 옮겼나 싶다. 그나마 미리 조카녀석들 보기 전에 확진 판정이 나와 다행이다. 조카들에게 옮겼으면 진심 스트레스였겠지 한다.
[2022년 9월 16일. 저녁부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추석이 이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추석도 지났는데 점심엔 후텁지근해서 지치더니만 저녁무렵부터 구름이 몰려와 비를 퍼붓고 있다.진심 퍼붓는 거다. 잔잔한 빗소리 같은 건 이제 무슨 효과음이나 배경음악 같은데서나 쓸 이야기고 요즘 비는 양동이로 물 끼얹듯 내린다. 에어컨을 다시 틀었다. 진심 머리가 멍해지는 날씨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진심 끝이 없는 게, 모든 어리석음이 지혜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지혜는 없다. 모두가 속이는 말에 취해있을 뿐이다. 어떻게 할지 도통 모르겠다. 이런 와중에도 야구에 짜증을 내고 소설 쓸 일에 골몰하는 내가 참 무의미하고 하찮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찌하겠나. 난 내 몫의 무의미를 이겨나가야 한다. 의미는 삶 뒤에 온다. 일단 무의미해 보이는 삶을 난 계속 쌓아나가야 한다.
[2022년 9월 20일. 같은 하늘색인데 기온만 6도 정도 떨어졌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시편 12편 8편 말씀) 딱 지금이 그런 시대다. 이 시대 속에서 난 비열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아닌채로 살 수 있을 것인가?
[2022년 9월 25일. 날이 좋았다]
모든 문제는 늘 '돈이 없어서'로 귀결되지만 사실 돈보다 부족한 게 내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2022년 10월 2일. 비가 비처럼, 모처럼 비처럼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나가보니 비가 내렸다. 툭툭 뿌리는 비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휩쓸어가버리지 않을 것 같은, 땅을 도닥이는 하늘의 편지 같은 차분한 비였다.
오늘 예배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 마무리 기도를 남겨둔다. 두고두고 읊조리게 될 기도문이라 생각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각각의 현실과, 도전과, 위협과, 갈등과, 절망과, 비명속에
이 세상이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시험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키우시려는 의지와 성실하심으로 우리를 흔들고 계십니다.
못난 소리를 속히 끊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기대와 믿음을 가진,
그래서 스스로가 영광과 자랑의 자리에 나아가는,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그 인생을 살아내도록
주여 축복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2년 10월 6일. 순천은 맑았고 서울은 흐렸다]
급히 이틀 휴가를 내고 여수를 다녀왔다. 기차표를 못구해서 차로 다녀왔으니 허리가 아프고 내일이면 발목이 시큰하겠으나 그 정도는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올라오는 길 순천만습지에서 점심 먹고 한바퀴 걸은 게 좋았다. 청보리처럼 아직 덜 핀 갈대밭을 걷는 기분이 꽤나 즐거워서 언젠가 늦은 가을에 다 핀 갈대밭 위로 노을지는 모습을 꼭 한 번 보고 싶어졌다.
[2022년 10월 9일.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책상 위엔 자석으로 된 달력이 있다. 지난번 조카들이 다녀갔던 날 큰조카가 해보고 싶다며 10월 달력을 맞춰주고 갔다. 내 기준엔 비뚤한 배치인데 건드려서 바로잡을 수가 없다. 그냥 이대로 두고 본다. 완성품이 아닌데 완성되어 있다. 아이가 손을 대어 만들어준 것에 대한 감사. 이해.
[2022년 10월 31일. 아무렇지 않은 가을이다]
어젯밤 잠이 안와서 뉴스를 보다가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마주했다. 정확히는 그제 새벽이겠구나. 뉴스는 이태원에서 압사사고가 일어나 서른명 가량이 죽었다고 했다. 그 숫자가 오늘은 결국 154명까지 늘어났다. 다 그저 축제를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이었다.
예전 같으면 길을 막고 통제를 해서 없었을 일인데 이번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그냥 누구나 다니던 해밀턴 호텔 옆 골목에서 사람이 사람의 무게에 짓눌려, 내 몸으로 타인을 죽이고 타인의 무게에 내 심장이 눌려 세상을 떠났다. 이보다 더 잔혹한 죽음이 있을까? 중심을 잃은 무게에 떠밀려 간 순간 그들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몸이 물처럼 파도칠 때 그들은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이래놓고 난 내 삶을 산다. 그들의 죽음이 내게서 무척 먼 것처럼. 세월호가 그랬다. 그 사이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 또 그랬다. 난 내면의 잔혹으로 외부의 잔혹과 맞선다. 삼투압을 버틸 힘은 그것 뿐이다.
[2022년 11월 6일. 추워서 겨울 옷을 꺼내 입었다]
오늘 대표기도를 하시는 장로님이 너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셨다. 계속 비슷한 말로 하나님의 크심을 찾으셨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십니다. 그걸 계속 말씀하셨다. 눈을 감은 채로 왜 저러시나 싶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장로님은 이렇게 물으셨다. "왜 이태원에서 그 죽음의 부르짖음을 내버려 두셨습니까?"
설교 본문도 그랬다. 사사기 6장 11~16절 말씀이었다. 기드온이 묻는다.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이건 내 질문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버리셨던 게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수 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기드온은 체념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그를 '큰 용사'라고 부르신다.
나도 체념중이다.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다. 사소한 가난에 쩔쩔매는 형편 때문에 아무리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도 내 살아갈 걱정만 늘 앞선다. 이러는데도 하나님은 무응답이신 것만 같다.
이런 내게도 힘을 주실까? 내 체념이 은혜의 그릇이 될 수 있을까? 체워줄테니 주변에 찾아가 빈 그릇을 몽땅 긁어오라, 이웃의 한숨과 아픔까지도 끌어안고 방에 문을 걸어 잠근 후 내 앞에 나아오라. 네게 있는 단 한 종지 기름으로 내가 하는 일을 보여주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외치고 계시는 걸까? 이 악독한 세대를 네가 한 사람 치듯 치게 되리라. 이렇게 주께서 말씀하시는가.
더 많은 내용이 있지만 옮길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최대한 윤색을 줄이려고 했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사람 이름은 되도록 들어냈다.
일기라고 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있는 문장들이 나를 말해주고 있는 건 아니지 싶다. 난 이 안의 비문들보다도 못났다. 2022년의 나도, 2024년의 나도.
일기를 적는 게 그때는 크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돌이켜 보니 여러 감정들이 떠오른다. 그새 잊고 있었던 분노와 가슴아림들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여기 있는 문장들은 꽤나 낯설다. 2022년의 누군가가 내게 보낸 편지처럼 읽었다. 그는 나름 나와 비슷하지만 지금의 내가 다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살아간 것 같다.
새해 들어 아직까지 일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데 조만간 짧게라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옮기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책 리뷰나 에세이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서 신기했다. 그때 난 '하고 싶지만 아마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설프게나마 하고 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첫 걸음이 어렵지 걷다보면 또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