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집 23
유행이라는 단어를 꺼내기가 무서운 건 내가 무언가의 유행을 인식할 때 쯤이면 이미 끝물인 경우를 하도 많이 겪어서다. 이런 현상의 동의어를 '나이 먹었다' 고 한다. 당연히 하루하루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매일 유행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유행하는 것 중 MBTI는 그 수명이 아직까진 이어지고 있는 모양새로 느껴지는데(정녕 그런지는 모르겠다), 되도록이면 더 길게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MBTI 이야기 꺼낼 때면 그 비과학성을 진지하게 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럴 필요가 있다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다. 주전부리는 어디서나 환영을 받는다. 그게 혈액형 성격이론이든, MBTI든, 사주풀이든 누군가와 잠깐 웃으며 떠들 수 있으면 그만 아닌가 싶다.
내 MBTI는 INFP-T로 F와 T가 반반쯤 섞여있다. 요즘은 확실히 T성향이 더 늘어나는 거 같기도 하다. 특히나 심신의 피로가 쌓이게 되면 고슴도치처럼 매사 뾰족해지기 때문에 더더욱 T발놈이 되어서 허락만 해준다면 내 눈 앞의 커피가 식기 전에 테이블 맞은 편에 앉은 사람에게 뺨을 얻어맞고 절교통보를 받아낼 수 있을 정도다.
아무래도 안변하는 건 I 성향이다. 다행히 사람들과 지내며 나쁜 소릴 들어본 적은 없다. 어디서든 모나게 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특히 나보다 윗사람들에게는 나름 인정도 받으며 지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들을 만나도 충전이 되는 기분은 잘 들지 않는다.
거기다가 계획이란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처럼 계획을 세워봤지만 지킬 수 있는 게 없어서 무계획이란 계획만 가지고 사는 게 내 인생이지 싶다. (진심 봉준호는 잔혹한 사람이다.) 그때그때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왔는데 아직까지는 어디 갇혀서 15년동안 군만두만 먹는 형벌을 받지는 않고 있다.
한때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나도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내용을 또렷히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리 절실하진 않았다는 얘기다. '한강뷰 40평대 아파트 갖기'나, '서울 역세권 5층 이상의 빌딩 건물주 되기' 같은 게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볼리비아라는 나라를 여행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의외로 여행인프라가 좋지 못한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유튜버들 영상을 보면 무엇보다도 먹는 게 그다지 안 맞는 느낌이랄까? 또한 워낙 고지대가 많아서 고산병에 시달릴 수도 있다. 나처럼 개복치과 체력이 과연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가보고 싶은 1순위 여행지다.
생각해보면 다 어딜 가는 거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완공되면 바르셀로나 가보기' 가우디 건축물들 보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구석에 자리 잡고 햇살 받으면서 기도를 해보고 싶은데 상상만해도 관광객 소리에 시끄럽기 그지 없다. '미국 몬탁해변 가보기' 이건 순전히 미쉘 공드리의 영화 '이터널선샤인' 때문인데, 거길 가자고 미국을 가나 했지만 얼마 전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보고 미국 동부에 갈 핑계가 하나 늘어서 이런 식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추가되면 꽤 괜찮은 코스가 나오지도 싶다.
그리고 친구들과 얘기 나온 건 '나이 앞자리 5 찍기전에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가 있는데, 다들 시간과 돈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체력의 문제를 과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우울한 대화가 이어졌다. 사실 나만 '헤비'인 게 아니라 어쩌다 다들 '헤비S'가 되어버려서 순례길 가기 전에 훈련부터 해야 할 판국이다.
그리고 탱고. 사실 이건 어릴 적 버킷리스트였는데 아내가 있으면 같이 탱고를 배우면 어떨까 싶었다. 유튜브에서 아스토르 피아졸라 음악을 찾아 듣다가 그의 'Oblivion'에 맞춰 남녀 댄서가 춤을 추는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 말고 여자친구나 아내와 같이 춤을 춘다는 게 멋있을 거 같았다. 둘이 계속 춤을 같이 춰서 한 70쯤 되서도 거실 한 쪽에서 LP를 걸어놓고 춤을 추는 거다. 물론 지금은 내 몸뚱아리도 문제고 상대도 없고 그래서 요원해진 버킷리스트다.
거기에다 할 수 있으면 엄마 정원 만들어주기. 식집사인 엄마는 늘 집이 좁고 해가 잘 들지 않는다는 게 불만이시다. 어렸을 적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정원을 잘 가꾸셨단다. 전쟁통에 아들을 다 잃고 딸만 넷을 키웠던 외할아버지는 옛날 사람 같지 않게 무척 자상하셔서 딸들이 기죽을까봐 언제나 학교 준비물 같은 게 있으면 알아서 다 가져다주곤 하셨다는데, 술을 워낙 좋아하셔서 일찍 돌아가셨단다. 아직도 엄마는 옛날 시골집 담벼락의 정원과 조그만 연못을 그리워하신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못은 무리고 정원 정도는 만들어드리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마도 지금 사는 동네에서는 말이 안되는 일이어서 언젠가는 훌쩍 떠나긴 해야지 싶다.
사실 이게 다다. 막상 거창하게 버킷리스트라고 이름을 붙일만한 것도 없다. 누군가는 이미 다 해본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맘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냥 사는 형편만 좋아지면 문제가 아닌 일들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떠오르는 것도 이런 것 밖에 없어서 버킷리스트를 적을 때마다 '사는 게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지는 건가' 싶어 조금 서글퍼질 때가 있다.
단어를 조금 바꿔서 그럼 '소원'이나 '꿈'이 무언가를 생각해볼까? 당장의 소원은, 진심 한 달만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바닷가 골방에 틀어박혀 있고 싶다. 캐리어 하나 가득 책 담아가서 점심 먹기 전까지는 책 읽고, 점심 먹고 나서는 이런 저런 생각나는 것들 끼적거리다 오고 싶다.
또 다른 소원이 있다면? 갑자기 스케일이 말도 안되게 확 커지는데, 그 전에 미리 말하자면 난 꽤나 오만한 인간이란 거다. 게다가 아직도 중2병을 못 고쳐서 손 안에 흑염룡이 날뛰... 난 세계를 갖고 싶다. 우주 정복이 아니라, 나만의 세계를 가지고 싶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건 나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물론 아직까지 나의 세계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궤도를 잡아서 던진다고 던져봤는데 내가 생각한 것과는 영 다른 곳으로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내 세계를 갖고 싶다.
꿈은? 내가 만든 그 세계가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 혹은 위로가 되길 바란다. 난 근본적으로 해피엔딩 매니아다. 이야기가 슬프게 끝나야 할 이유는 없다고 믿는다. 점점 희망도 위로도 의미없는 단어처럼 변해가는 세상이지만, 난 근본적으로 모든 예술은 어떤 형태로든 희망이거나 위로여야 한다고 믿는다. 난 예술가는 아니지만, 아마도 그 비슷한 언저리의 일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지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거라 생각한다.
바람은 있으나 결실은 없이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길다. 그래도 언젠가는 내 소원들이 이뤄질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여기 적어두는 이런 글들도 그 소원을 향해 놓인 작은 계단들이 되어주길 바란다. 물론 내 소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결국 내 세계를 이루는 언어들을 쌓아올려야만 한다.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