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당연히 이런 저런 일들을 겪는다. 어떤 일들은 마주한 그 순간엔 이 일 이전과 이후로 인생이 나뉘어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아직까지는 시간을 이기는 일을 만나지는 못한 것 같다. 시간은 모든 일들을 놀랍도록 쉽게 풍화시킨다. 어느 순간 그런 일이 있었지 싶어 돌이켜보면 동글동글한 몽돌이 되어있다. 파도가 질 때마다 촤라락 소릴 내며 구르지만 그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진 못한다.
반대로 어떤 일은 일이 벌어졌을 그땐 아무렇지 않게 잘 해결했으니 됐고 아무 일도 안생겼으니 됐다 하고 지나치지만, 이상하게 잔상을 떨칠 수가 없다. 시간은 이런 일들도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런 일들은 시간과 맞서 싸우지 않고 기묘하게 비껴난 채로 그림자만 길게 드리운다.
내게 있어 후자의 경우로 남아있는 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 역시 버라이어티했던 전경 시절의 일이다. (내가 뭐랬나, 별일 다 있었다니까.)
최고참이 되면 정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직원들 얼굴 볼 일도 사라진다. 밥 주면 밥 먹고, 잠 자고 새벽에 근무 서고 다시 자고, 이쯤되면 생활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육에 가까워진다. 마침 그 무렵 우리 초소는 외장공사가 있어서 늘 공구리를 친다, 페인트를 칠한다 바깥이 시끌시끌했는데 나만 완벽하게 열외된 채 제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무를 아예 뺄 건지 아닌지에 관한 선택권도 내게 있었는데 난 그냥 후임 하나랑 같이 야간근무를 서기로 했다. 말이 근무지 야간근무 중에 벌어질 일이란 게 없다. 밤새 TV나 보고 가끔 통닭이나 시켜먹으면서 간혹 들어오는 무전청취만 잘하면 그만이다. (무전도 후임이 듣는다.)
그런데 그날은 갑자기 초소 앞에 승용차가 멈춰서더니 양복차림의 남자 둘이 안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왔다. 근무복을 다 풀어헤쳐놓고 편하게 앉아있던 나와 후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다. 경찰청에서 불시에 점검 나온 건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고보니 상대는 교도관들이었다. 재소자 한 명이 몸이 안좋아서 관내 병원에 검진을 하려고 데리고 나왔는데 화장실에서 그만 놓쳐버렸다나? 동선상 우리 초소 앞 국도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으니 검문을 해달라고 했고, 난 한숨을 쉬며 바리케이트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새벽 3시가 넘은 왕복 4차선 국도에 차량이 많을 리가 없었다. 난 차선을 밟고 도로 가운데에 서서 오는 차량들을 갓길로 유도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걸 언제까지 해야하나 하고 있는데, 멀리서 차 한 대가 달려왔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차선을 밟은 채로 경광봉을 흔들고 있었다. 당연히 차량의 헤드라이트는 정면이 아닌 약간 옆에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상대의 두 눈이 날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다.
깊은 새벽 귀뚜라미만 쓰륵쓰륵 울어대는 적막한 시골이어서 그랬을까? 다들 조금은 몽롱한 상태에서 검문을 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상황이 파악되었을 때는 이미 대형트럭이 거대한 실루엣을 벗고 육안에도 확실히 들어온 시점이었다. 다들 그제야 호루라기를 불고 경광등을 흔들고 난리가 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난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고, 트럭은 내 몇 발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멈춰섰다. 교도관들은 트럭기사를 향해 쌍욕을 날렸다. 졸음운전이었다.
온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나를 교도관들이 다시 초소로 데려왔고, 다른 후임이 나와서 대신 근무를 섰다. 이불을 푹 덮어 쓴 채 한참을 바들바들 떨다 겨우 잠이 들었다. 탈주를 한 재소자가 잡혔는지 아닌지, 언제까지 검문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다음날 난 새벽에 일이 벌어졌던 그 자리에 나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트럭이 남기고 간 건 긴 스키드마크 뿐이었다. 그 끝에 어쩌면 내 몸뚱아리를 표시하기 위한 흰색 마카가 남겨질 수도 있었다. 같이 검문을 나갔던 후임의 말로는 내가 그 자리에서 계속 뒷걸음질을 치더란다. 난 사실 트럭의 커다란 헤드라이트만 기억 날 뿐 그때 어떻게 행동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마치 맹수의 눈에 사로잡힌 초식동물마냥 그 헤드라이트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왜 난 옆으로 도망치지 못했을까? 상대가 정면으로 달려온다는 걸 파악한 순간 옆으로 피했으면 어땠을까?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순간 얼어붙어서 트럭의 동선에서 벗어나질 못한 거다.
그때 알았다. 문제에 시선을 사로잡히면 시야가 좁아진다는 걸. 어떻게든 시선은 넓게 유지를 해야 한다. 난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 비슷한 일을 제대 후에도 한 번 더 겪었는데, 난 눈이 많이 오던 겨울날 야트막한 언덕으로 된 골목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한쪽에는 차량이 쭉 주차되어 있었고, 멀리서 1톤 트럭이 매우 느리게 달려왔다. 인도 구분이 따로 없었던 골목길이라 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채로 트럭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과속방지턱을 밟은 트럭이 순간 미끄덩하더니 앞에서 빙글 돌기 시작하는 거다. 난 늘 생각해왔던 대로 속으로 '옆으로!'를 외치며 주차된 차량 사이로 몸을 날렸다. 트럭은 주차된 차들 옆면을 퉁퉁퉁 긁으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맞다. 문제에 시선을 사로잡히면 시야가 좁아진다. 그러면 문제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충분히 문제를 피할 여유가 있음에도 그 여유를 없애버리는 게 나 자신이 된다. 그러다보면 운이 좋아 살거나, 아니면 문제에 치어 크게 다치고 만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이후 난 어떤 문제가 벌어지면 일단 시야를 넓게 가져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확실히 판단도 정확해지고 길도 잘 보이게 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잠깐 죽을 뻔 한 그 날 이후로 내가 모든 일의 선택지 맨 마지막에 '회피'를 넣어두게 된 건 아닐까? 가장 쉽고 안전하다는 핑계로 어쩌면 계속 옆길만 흘끔거리면서 살아온 건 아닐까? 때로는 깨질 걸 각오하고 온 몸을 던져야 하는 일도 있는 건데, 언제나 움츠리고 도망칠 생각부터 한 건 아닐까?
일단 피할 생각부터 하는 건 결국 나를 지키고 싶어서일텐데, 모든 일을 피하기만 하면 그게 과연 나를 지키는 걸까? 모든 일의 결국이 고작 '나 하나의 안전함'이라면 그 많은 일들이 내게 벌어질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난 첫번째 글에서 '불모'를 말하며 마치 글쓰는 건 사막을 걷는 일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글이 그 사막 위로 내딛는 스무 번하고도 또 한 번의 발자국인 셈이다. 하지만 아마도 사막은 내 발자국을 다 집어삼켜 등 뒤로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을 테다.
글을 쓰고 있으면 그런 느낌이 든다. 매일 걷는 길인데, 당장 가야 할 곳이 어딘지도 잘 알고 있고 여유를 부릴 시간 없이 길을 나섰는데, 어떻게든 빨리 약속장소에 도착해야 하는데, 확실하게 길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발이 말을 듣질 않는다.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캄캄한 방에 갇힌 기분이다. 너무 캄캄해서 이 방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커도 두렵고 작아도 두렵다. 그 방이 아주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다.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사방이 와르르 무너져 이 까만 방과 내가 함께 사라질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도 싶다.
이게 단순한 '내 글 구려병' 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난 언젠가부터 계속 이 방을 벗어날 생각부터 한다. 어쩌면 늘 제대로 치이지도 않고 그냥 도망치기만 바빴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서 있을 용기가 없어서, 한 번 제대로 무너질 용기가 없어서, 정작 아무 것도 지키지 못하고 아무 것도 쌓아올리지 못한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 내게 덤벼들고 있는 저 헤드라이트는 1톤 트럭도 아니고, 대형트레일러도 아니고, KTX쯤일지도 모른다. 난 붕괴 수준이 아니라 살점 하나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히 부서져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 도망치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도망친다는 건 느리지만 확실하게 무너진다는 뜻에 불과하니까.
당연히 늘 그래왔듯이 후회하겠지. 맞다. 그럴테다. 그런데 그런들 어떠하겠나. 어차피 지금껏 후회하며 살아왔는데, 몇 개의 후회 쯤 더 보탠다고 더 부끄러울 것도 없다. 도망치고 피해다니며 쌓인 후회들 위에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아서 생긴 후회를 쌓아보기로 하자. 애써 만든 후회 위에다 열심히 만든 후회를 쌓아 올린 그 무언가를 가지고도 삶이라 부를 수 있는 날이 언젠가 한번 쯤은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