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프렌즈 찍으려다 막장 드라마 찍은 이야기
예전에 한국에서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마다 그 긴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미즈넷과 네이트판.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이게 진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인가?"를 떠오르게 하는 글들이 쏟아지는 또는 쏟아졌던 곳들이다. 나와는 먼 이야기, 그저 신기한 오락 거리에 불과했는데 나에게도 그것들에 버금가는 인생 스토리가 생겼다. 한국에서가 아닌 머나먼 이 독일에서. 그 기념으로 이 신기방기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한다.
2020년 9월 16일
11월부터 새로운 방을 구하던 나는 방이나 세입자를 구하는 곳으로 유명한 WG-gesucht 사이트에서 방 제안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지역은 Junkersdorf, 쾰른 시내에서 조금 거리는 있지만 녹색 지역이 많고 조용한 동네다. 렌트는 480 유로에 20m2 사이즈, 제안을 보낸 사람은 그 집에 세를 살고 있는 50대 독일인 아주머니였다. 직업은 의사. (아... 의사를 강조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2020년 9월 17일
곧 휴가를 떠난다는 말에 저녁 7시 30분에 급히 보러 간 방은 20m2가 아닌 14-16m2 정도 되어 보였지만 뭐 잘 모를 수도 있지 라고 생각했다. 간단히 방과 집안을 본 후 내가 쾰른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왜 방을 찾고 있는지 등등 대화 시간을 가졌다. 이전 잔소리쟁이 룸메의 영향으로 나는 집 상태를 스캔했고 그녀가 별로 깔끔하지 않다는 사실을 체크했다. 난 내 공간만 내 기준에 맞게 유지하면 되니까. 그리고 집에 룰이 있는지, 새 룸메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이전에 쉐어 경험은 있는지 등등. 그녀는 여행과 일로 자주 비워져 있는 집이 아까워서 룸메를 찾는 거라고 했다. 본인이 그다지 정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했고 아이들을 셋이나 키워 딱히 까탈스럽게 따지는 것은 없다고 했다...(정리를 잘 못하는 건 진실, 하지만 따지는 게 없다는 건 거짓말ㅋㅋ) 가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에 고민되는 마음으로 첫 번째 인터뷰가 끝났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기본적인 가구는 구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메세지를 받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나중에 이사를 생각해서 가구를 사지 않아도 되는 곳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2020년 9월 20일
마침 번호를 바꿨다며 연락이 와서 방을 렌트하겠다고 말했다.
2020년 9월 21일
집주인에게 이야기해서 승낙을 받고 계약서를 보내준다고 했다.
2020년 9월 23일
집주인이 요구한 서류 내역과 계약서를 작성한 후 보증금을 바로 받고 싶다는 메세지가 왔다.
그리고 이때 보증금이 처음에 제시했던 것과 달라 다시 물어봤는데 이때 싸했던 그 느낌을 믿어야 했는데... 다급한 상황인 나는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9월 26일
대망의 계약서 작성 날. 그녀가 미리 이야기한 그녀의 남자 친구도 함께였다. 그는 일과 공부에 대해 물었고 이때 현재 코로나 때문에 홈오피스로 일을 하고 있고 논문을 끝내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했다. 이후 나는 보증금을 바로 보냈다.
2020년 10월 31일
하루 일찍 이삿짐을 모두 옮겼다. 방에는 널찍한 데스크와 작은 침대 그리고 옷장이 있었고 나머지 그녀의 갈데없고 쓸데없는 오래된 가구들이 있었다. 사용하지 않을 거니 빼 달라고 했지만... 여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허허
2020년 11월 1일
새로운 방에서 첫 밤. 그리고 폭풍전야, 악몽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었지만 나는 잔소리쟁이 룸메를 피한 것에 행복해하며 대충 짐을 정리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악몽의 시작
11월 첫 주 - 하루 이틀 지나자 왜 밖에 안 나가는지 묻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홈오피스를 하고 있고 논문을 같이 하느라 방에서 거의 시간을 보낼 거라고 했는데 이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질문인지. 이어지는 그녀의 코멘트, 내가 바쁜 커리어 우먼인 줄 알았다며 집에 계속 있을지 몰랐다고... 응??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거다 그녀는. 그리고 이어지는 펀치, "나는 일 끝나고 나만의 내 아파트가 필요해"... 응??? 플랫 메이트를 구한 사람이 하기엔 매우 생소한 멘트. 그렇게 악몽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져 갔다.
11월 둘째 주, 셋째 주 - 그녀의 요구가 점점 노골적이 되어간다. 주말에는 오전 공부 후 남자 친구네 집에 가는 일이 많았는데 뜬금없이 금요일에 가 달라고 요구하거나 노크 없이 내 방에 들어와 내가 있는 줄 몰랐다며 다시 나가기도 했다. 아침엔 쿵쿵 대며 주방에서 시끄럽게 하기 일수고 쉬는 날엔 동네 떠나가라 음악을 틀어댔다. 아마 내가 불편해서 나가겠다고 하기를 바라며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든 저녁에는 주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결국 내가 늦은 저녁을 먹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시때때로 가족과 지인을 초대해서 (코로나가 심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야기 없이 더 늦은 시간까지 본인의 시간을 즐겼다. 그 때문에 저녁을 굶는 일도 종종 있었고 스트레스로 살이 빠지고 혈뇨 증상도 일어났다. 어느 날 그녀는 우리는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돌려 말했지만 결국 나에게 나가 달라고 했다. 그녀의 태도도 지저분한 집 상태도 더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한 나는 옳다구나 그러겠다고 했다. 보증금을 바로 돌려주는 조건으로... (독일에서는 6개월 이상 보증금을 가지고 있다 돌려주는 일도 빈번하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뭐가 그리 의심스러운건지 집을 찾고 있는지 하루에 한 번씩 물어댔다. 아... 스트레스. 나야말로 당장 나가고 싶건만...
11월 넷째 주 - 집을 찾고 있냐는 질문을 또 한 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녀가 나에게 제안을 해온다. 집에 유령을 둔 것 같아 불편하다며, 대화를 통해 해결해 보자던 그녀. 내 저녁시간을 6시-7시로 정하고 그 이후에 그녀가 그녀만의 프라이빗 타임을 가지는 걸로 이야기가 됐다. 그리고 11월의 마지막 날 나는 단 한번 이 시간에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렌트를 내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 이런 제안을 한 게 아닌가 싶다.
12월 첫째 주 - 띨롱, 아침에 온 그녀의 문자. "점심에 따뜻한 거 먹어, 저녁때 키친에서 내 시간이 필요해" 그렇다 저 원대한 제한은 하루로 땡이었다. 그래서 나는 렌트를 낮춰달라고 했다. 저녁을 샐러드로 계속 사 먹고 있었으니 억울하지 않은가. 낼 거 다 내고 내 밥도 못 챙겨 먹다니. 전화로 내가 부당함을 주장하자 당장 다음 달 나가라 고소하겠다 라고 성을 냈지만 결국 주방을 그대로 쓰고 렌트도 그대로 내고 방을 찾아서 나가는 걸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수요일, 그녀가 쉬는 날... 이제 그녀는 다른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내가 독일에 왔으니 점심에만 따뜻한 음식을 먹는 걸로 바꿔야 한다는 거다, 독일 사람들처럼. 아침 토스트를 포함 세 끼니를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내가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느꼈다. 아... 그녀는 집에서 내가 쓰는 에너지가 싫었던 거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기니 그래도 최대한 아끼려고 낮에도 난방을 낮추고 뜨거운 물 주머니를 안고 일하던 내가 바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난 또 샐러드 저녁으로 돌아갔다.
12월 둘째 주 - 최대한 그녀와의 마주침을 피하고 있다.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여전히 내 저녁은 레베에서 사 온 샐러드고 수요일은 친구의 집으로 피신을 왔다. 그녀가 쉬는 날이기 때문에. 그녀는 쉴 새 없이 주방에서 통화를 해댄다 아침부터. 그녀는 주방을 그녀 방의 일부분처럼 사용한다. 무슨 용기로 쉐어 하우스를 제안 했는지 아직도 신기하다. 이제 한 주만 더 견디면 이사다. 이사 가면 부대찌개 해 먹어야지... 아님 고기 구워 먹든가.
역시 세상은 배움으로 가득하다. 이런 황당한 경험으로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1. 독일에서는 다 기록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날짜, 시간, 정확한 내용 등등 모두 기록해 두자. 독일은 녹음이 불법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료를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구두로 끝낼 것이 아니라 메세지로 대화하거나, 불만 사항 등을 메일로 보내 둬야 한다.
2. 억울하고 괘씸하지만 정신 건강을 위해서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 아니라면 미친 자는 피하는 게 속편 하다. 처음에 대화를 시도하다가 소모된 내 에너지만 아깝다. 미친 자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텍스트로 대화하는 것을 꺼려하며 문자를 보내도 꼭 전화로 답하거나 집에 있을 때 이야기했다. 본인은 텍스트 대화를 싫어한다며. 이런 경우 증거 모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3. 집주인이나 주 세입자랑 같이 사는 거 아니다. 앞으로 나는 싱글룸에서만 살 계획이다. 프렌즈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던 셰어하우스의 이미지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박살 났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흘러 이 글을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난 이제 카르마를 믿을 테다. 나의 마음의 위안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