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잡스 유진 Jun 06. 2024

고추장을 들고 튀어라.

 나보다 갱년기를 먼저 맞이한 남편 관찰일기3

      

    

”정말 감사드려요. 도와주신 덕에 작년에 비해 직원수도 많이 늘고, 회사가 커졌네요. “

”아... 네.. 그런데, 누구신지. “

얼핏 봐도 연예인 뺨치는 미모의 여성이 새하얀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잠시 후, 남동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정말 감사드려요. 권 부장님 덕분입니다. “

”아... 저희 남편이... 호호, 네 잘 됐네요. “

’이 인간이 어디서 또 오지랖을 부리고 다니냐, 자기 밥그릇은 안 챙기고 맨날 남 일만 앞장서는 못 말리는 인간.‘

어색한 분위기에 주위를 둘러봐도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낯가림이 심한 나는 이 분위기를 못 견뎌한다. 애써 사회적으로 학습된 웃는 얼굴로 

”그럼, 전 이만. “하고 그 자리를 허둥지둥 벗어난다.      




몇 발걸음을 걷자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오빠, 어떤 여자랑 남자가 무지 고마워하더라. 덕분에 회사가 컸다고. “ 눈을 흘겨본다.

”아. 그래? 뭐... “

”.............. “     

그런데 어디선가 싸한 느낌이 든다. 아까부터 누군가 우리를 지켜본다. 

빨간 소형차 한 대가 선다. 얼핏 본 차 안에는 험상궂은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다.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 차에 자꾸 시선이 간다. 

남자는 조수석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더니, 날카롭게 섬뜩한 무언가를 꺼낸다. 

순간, ’이건 칼이다.‘ 싶었다. 

”오빠. “

”어? “

”뛰어. “

”뭐라고? “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라고. 어서!!!! “

슬리퍼를 신은 나는 온 힘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은 표정으로 뛰기 시작한다. 슬리퍼를 신은 나보다 느린 남편. 안 되겠다 싶어 손을 잡아 끈다. 

”있는 힘껏 뛰라고, 자꾸 뒤돌아보지 말고. “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남자가 쫓아오고 있는 건 확실하다.      




밝은 불빛의 GS편의점이 보인다. 늦은 시간까지 동네를 환하게 해주는 곳은 역시 편의점뿐이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도와달라고 호소할까 싶었지만, 왠지 피해를 줄 것 같아 조금 더 뛰어보기로 했다. 300미터만 더 뛰면 경찰서가 있다. 

그런데 오늘따라 경찰서가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집 앞 경찰서는 걸어서도 5분이 안 걸리는데 뛰어도 뛰어도 경찰서가 보이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명의 여성이 함께 뛰고 있는 게 아닌가. 영문도 모른 채 그들과 있는 힘껏 달렸다. 남편이 뒤쳐질세라 왼손에 힘을 더 주어 꽉 쥔 채로 뛰었다. 

’ 평소에 살 좀 빼라니깐. 이러니 달리기도 못하지.‘

공포스럽고 다급한 상황에 이런 생각이라니,     

달리던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말한다. 

”이거 받으세요. “

”네? “

어느새 내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다. 

고추장통!

’이 걸 왜...‘ 싶었지만 더 말을 하다가는 숨이 차오를 것 같다. 

몇 발짝만 더 뛰면 경찰서다.      

경찰서 문을 다급하게 열었다. 아니 열어젖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거칠게 열고 뛰어들어갔다. 두 명의 여자도 뒤이어 들어온다.      

”헉,, 헉.. 헉... 경창관님... 저기.. 저.. “

숨이 차서 말이 쉽게 안 나온다. 혀가 굳은 것처럼 입 밖으로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같이 뛰어온 여자 중 한 명이 말한다. 

”경찰관님, 이거 드셔보세요. 이거, 귀한 도라지를 넣어서 숙성시킨 고추장이에요. “

이 상황에 고추장이라니 너무나도 기가 막혀 여자를 쳐다본다. 

고추장 뚜껑을 열어 경찰관에게 한 술 건넨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게 뭐냐고??     




꿈이다.      

오늘 새벽 꾼 꿈이다.      

아침 출근 전 고추장호박찌개를 우적우적 먹던 남편의 모습이 뇌리에 깊이 박혔나 보다. 

고추장을 들고뛰는 다급한 장면이 꿈으로 나오다니.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30분,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현실에서도 뜀박질을 한 것처럼 심장이 뛰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마음을 추슬려본다.      

한 시간 뒤 남편이 방에서 나온다. 

어제보다 한 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부엌으로 들어간다. 

뚜딱뚜딱, 가벼운 손놀림으로 요리를 하기 시작한다. 

콧노래도 부른다.      

’다 나았나. 그 사이에?‘ 그럴 리는 없지만,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잠시나마 안심했다.     

”고추장 어딨어?“

”어???? 뭐 고추장??? “





손을 꼭 잡고 있는 힘껏 뜀박질을 한 것처럼 갱년기에서 이 남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한가 보다.

고추장이 다소 코믹스러웠지만 간절함이 꿈으로 나왔나 보다. 

나는 이 남자를 구출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