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총량의 법칙
“ 이런 일 해 보셨나요? ”
“ 아뇨. 안 해봤지만, 잘 할 수 있습니다!!!”
공손히 핸드폰을 들고
자신감 넘치고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없이 알바검색을 하고 지원했는데 대부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내 나이가 많아서일까?
나는 쓸모 있는 존재인가?
그렇게 상심에 빠져 있을 때 찾아온 설거지 알바 연락은 참 고마울 지경이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나중에 사장님께 들었는데 당차게 말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무경력자인 나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간절했던 게 틀림없었다.
한여름 치열했던 설거지옥의 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일한 식당은 여름 한 철 손님들이 붐비는 음식점이었다. 점심 피크타임에 일손이 더 필요한 식당이었다. 특히 바쁜 주말, 부족한 일손으로 알바생을 추가로 구한 덕분에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식당 분위기는 좋았다. 사장님 부부도 너무 인상이 좋으시고, 고정적으로 일하는 베트남 젊은 엄마도 싹싹하고 일도 잘했다.
식당 시스템도 최신식이었다. 테이블마다 주문태블릿이 있었고 로봇 서빙도 있어 손님들이 식사한 후 정리만 하면 되니 내성적인 나 같은 사람이 일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주방 안에서는 애벌 설거지 후 식기세척기에 돌리면 스팀, 건조까지 빠르게 회전할 수 있게 되었고, 주문에 맞게 기본 반찬 세팅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다.
할 만하겠는데?
그러나 그 단순한 일들도 처음엔 버벅거렸다.
주문이 띵똥, 띵똥 계속 울리며 주문메시지 종이들이 토하듯 쏟아져 나오는데 진짜 토할 것만 같았다.
설거지 그릇들은 쌓이고 쌓이고 쌓여만 갔다.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폭풍처럼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사장님께는 미안하지만 손님이 오늘 조금 왔으면 하는 불순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그래도 처음엔 어색하고 힘들더니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미션수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쌓여있는 그릇들을 하나씩 클리어하는 마음으로 내 손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고, 썰물처럼 손님들이 빠져나간 조금 한가해진 오후, 늦은 점심으로 차려주신 사장님의 시원한 밀면은 꿀맛이었다.
그거 먹으러 일하러 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그러나 일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내 마음에 스크래치도 생겼다.
외국인 노동자 대하듯 하대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시간당 1만 원의 가치가 내 가치처럼 느껴질 때,
종종 거리며 바쁘게 살았음에도
텅 빈 통장을 바라볼 때,
이미 방전된 저질체력으로 집 안 구석구석 내 손길을 기다리는 것들을 하나, 둘 포기하면서
내 마음 상태 같이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었을 때,
그래서 우리집 싱크대 그릇들은 점점 쌓이게 되는
설거지 총량의 법칙을 몸소 경험했을 때,
여유 없이 궁상맞게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그런 생각들은 엄마에 대한 생각까지 닿았다.
궂은일 하며 딸내미 귀하게 키웠는데, 결국 자신처럼 궂은일 하고 있는 딸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나는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여름 치열했던 삶의 체험현장.
잠깐의 설거지옥을 통해 이런저런 스크래치도 생겼지만 상처 위에 더 단단한 딱지가 생기는 것처럼
마음의 굳은살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