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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아이라이너를 그리기 시작했다

by 따뜻

단기알바만 계속하다가 계약직이지만 풀타임 사무보조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급 일당만 받다가 월급으로 한 번에 큰돈을 받게 되니 마음까지 배가 불렀다. 물론 최저시급의 굴레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취업했다는 기쁨도 잠시, 마음이 지옥 같은 날들이 계속됐다.




둥글둥글 부드러운 인상이 만만한 건가? 좀 더 강하고 센 인상을 주고 싶었다. 당장 환불받아 올 정도로 쎈 언니처럼 보여야 했다. 아무도 나에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매서운 눈빛의 소유자가 되고 싶었다. 출근준비로 바쁜 아침, 기어코 아이라이너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라이너가 짙어질수록 내 자신감도 조금 상승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 저기, 최여사( 나이가 있다고 나에게 이상한 호칭을 붙였다)! 복사 (…….)장.. 좀 해 와요…“


웅얼거리며 하는 지시사항에 바짝 긴장한 나머지, 내 두 귀는 쫑긋거리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상사 책상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최대한 공손한 모습으로 다시 확인을 해 본다.


“ 복사 2장 하면 될까요?”


그러자 경멸과 멸시의 눈초리, 완전 개무시하는 표정으로 차가운 말이 돌아온다.


“ 한 번에 못 알아먹어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


“ 아… 잘 못 들어서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지만, 아닌 척하며 복사기 앞으로 다가간다.

그 순간 혼잣말인 것처럼 뱉은 쓰레기 같은 말이 내 귀에 똑똑히 들린다.


” 쯧쯧… 나이는 먹어서 제대로 하는 게 없네…“




오늘도 나는 이런 사무실 분위기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 처음엔 나만 열심히 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처음이라 미숙한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겠지. 내가 좀 더 일에 능숙해지면 분명 좋아지겠지. 출근도 미리 하고, 상사의 말에 귀 쫑긋하며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깔끔하게 일처리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를 무시하고 깔보듯 바라보는 눈빛과 함부로 대하는 말과 행동들은 점점 그 강도가 높아지는 것 같았다. 이게 맞는 건가? 월급에 욕먹는 값이 포함되어 있다던데, 모든 직장인들은 이런 대우를 그냥 참고 견디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문제가 있는 건가? 나는 능력과 자질이 부족한 형편없는 사람인 건가? 그래서 이런 사무 보조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이 먹은 아줌마에 불과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들은 결국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의 하루는 매일매일 불안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하루 종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사의 작은 말소리에 조마조마하며 지시사항을 놓칠세라 매 순간 초긴장 상태였다. 시간이 갈수록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것들로 트집을 잡는 일들이 잦아졌다. 복사를 3장 해야 하는데 2장 할까 봐, 이렇게 놓아야 하는데 저렇게 놓을까 봐, 별 시답지 않은 것들로 시달렸다. 나는 한여름 무더위에 축 쳐진 꽃잎처럼 점점 생기를 잃어만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사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감정적이면서 나를 밟아서 평가절하하고 자기 마음대로 나를 통제, 조정하려는 태도. 말로만 듣던 나르시시스트를 만난 것 같았다. 정말 최악의 상사였다. 복사를 2장 하든, 3장 하든, 그게 뭐가 중요한 문제야? 공문을 책상에 가로로 놓든, 세로로 배치하든 이런 사사로운 것들로 나를 들들 볶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웃긴 건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상사 앞에서 꼼짝 못 하고 아무 말 못 하는 나의 모습이었다. 얼어붙어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함부로 말하는 태도에 반격을 하고 싶었는데 언제나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눈물과 깜깜한 불면의 밤을 보냈다. 아까 이런 말로 되돌려줘야 했었는데 후회하면서 수없이 허공에 맴도는 말을 뱉었다. 상처는 점점 깊어져만 갔다.




매일 그리던 아이라이너가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내야만 했다. 좀 더 강하고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수없이 혼잣말로 연습을 했다. 또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닥쳐오면 당황하지 말고 분명히 말하자.


마음의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기까지 4개월이 걸렸다. 나는 사무실을 박차고 나오며 그에게 외쳤다.


“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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