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의 관중이었던 사람이 운동하는 이야기
어릴 적 나는 체력장과 운동회를 싫어하는 어린이였다. 초등 저학년 때는 반에서 키가 제일 작고 마르디 말라 담임 선생님께서 개별 방학 숙제로 밥 많이 먹고 살 찌워오기를 내주실 정도였다. 체력과 체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몸으로 하는 운동이 잘 될 리 없었다.
매번 느렸고, 느렸다.
경쟁 상황을 질색하여 느려도 이기려고 아득바득 달리지 못하는 순두부 같은 아이였다.
그러다 보니 달리기는 늘 꼴찌로 들어왔고 운이 좋으면 뒤에서 두 번째 정도였다. 체력장을 하면 기록이 반에서 거의 바닥이었다.
좀 더 커서는 스스로를 ‘운동 부진아’라 불렀다.
체력장 시즌이 오면 100m에 20초 가까운 기록을 들먹이며 내가 얼마나 느린지 친구들에게 스스로 웃음 소재로 사용하곤 했다.
친구들은 나름 최대 속력으로 내달리는 나에게 외치곤 했다.
"뛰어! 뛰라고!!"
경쟁적이지 않은 인간에게 운동회라는 행사는 가혹한 하루였다.
당연히 운동회에 대한 활기차고 인상적인 기억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구령대 위에 올라 학급 대표로 상을 받거나 계주에 선수로 나서는 일은 없었다.
친구들 앞에서 응원가를 크게 부르며 학급을 진두지휘하는 리더십 있는 학생도 아니었다.
나는 선수도 치어리더도 아니었지만 스코어를 보며 앞에서 넘어오는 파도타기 응원에 두 손을 번쩍 드는 정도의 관중이었다.
운동회의 관중이자 주변인이었던 나에게도 잠시나마 주인공들 중 1인으로 참여할 기회는 있었다.
짝꿍과 짝을 맞춰 추는 꼭두각시춤이나 운동장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화려한 꽃봉오리와 파도를 만들던 부채춤! 이런 단체춤 같은 활동은 나도 열심히 참여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까지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갓 국민학생이 된 나는 첫 운동회에 선보일 꼭두각시 춤을 연습하기 위해 준비물로 무릎까지 오는 짧은 치마의 색동저고리 한복을 가져가야 했다.
당시에는 정해진 공연 의상을 학교 앞 문방구에서 개별 구매해야 했는데 어릴 적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엄마는 절약정신을 발휘하여 작아진 내 한복의 치마를 짧게 잘라 꼭두각시 의상으로 만들어버리시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나를 제외한 모든 여학생은 색동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었고 나는 양 어깨에 무궁화 자수가 있는 공단 소재의 두툼한 한복을 입고 무대에 나섰다. 분홍색 저고리에 자주색 치마를 입었던 나는 어린 맘에 공연 내내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다들 '나 좀 보세요'라며 귀엽게 무용을 따라 하는 사이 나의 몸은 굳어가고 있었다. 바둑판 위 일렬종대한 백돌 들 사이에 흑돌이 된 느낌. 나는 너무 튀었다. 그날이 아마 내가 운동회를 싫어하게 된 시작점이 아닐까?
어른이 되어보니 스포츠 경기에는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의 포지션도 운동회의 관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경기장의 선수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는 성장하며 내가 빨리 달리지 못하지만 오래 달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체력장에서 빠른 친구들이 하나 둘 나가떨어질 때 나는 입안 깊숙한 곳에서 피맛을 느끼며 계속 달렸다.
토끼는 아니지만 거북이었던 나는 어릴 적 겪었던 결핍들을 바탕으로 꽤 경쟁적인 어른으로 성장했다. 지금의 경쟁은 타인이 아닌 나와하고 있는 것 같다. 30대 후반인 오늘의 나는 몇 가지 운동을 시도해 보며 운동으로 땀을 흘리면 개운하다는 말을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어릴 적 승부의 순간이면 슬며시 자리를 피하던 나는 경쟁형 운동보다는 스스로를 단련하고 기술을 하나씩 연마해 나가는 운동에 매력을 느낀다. 혼자 하는 달리기, 아령 무게가 늘어날 때마다 희열을 느끼던 크로스 핏, 6대 1 강습으로 저렴해서 등록했던 필라테스, 수영을 해나가며 인생 퀘스트를 하나씩 깨나가는 듯한 느낌은 일상에서 쉽게 채우기 힘든 자존감 레벨을 조금씩 높여 주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20대의 나보다 더 빠르고 오래 달린다. 나이가 들어가며 과거의 나에게 역전당하는 날이 곧 오겠지만 아쉽지 않을 것 같다. 전력질주에 집중하기보다는 나에게 "지금 이 순간 즐거운 거 맞아?"라고 물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