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대신 기차, 전철 대신 카카오 택시, 그리고 걷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가 전면 유리창에 연신 아름다운 추상화 한 폭을 그려 놓는다. 열어젖힌 커튼 사이로 늦가을 경포해수욕장의 고요한 아침 바다가 반가운 얼굴을 드러낸다. 밤새 머리맡을 지킨 저 멀리 수평선도 조용히 비에 젖어 있다.
사흘 내내 다음 행선지를 향한 아침 기차 시간에 맞추느라 쫓겼지만 오늘은 오후 기차 편이라 마음이 느긋하다.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던 새벽 온천과 리조트 뷔페 아침을 편안하게 즐기며 여행 마지막 날인 오늘을 시작한다.
선교장을 향해 길을 잡았다. 도보로 1시간 거리라고 맵이 알려 준다. 서늘한 가을부슬비가 오락가락 뿌리다 멈추길 반복한다. 우리들의 우산도 펴졌다 접혔다를 거듭한다. 경포호와 강릉생태저류지 산책길을 거쳤다. 깨끗하게 펼쳐지는 물과 풀과 꽃과 새, 하늘과 땅, 그리고 나무들. 나지막이 깔리는 가을의 정취가 그윽하다.
국도로 나와 매월당 기념관을 거쳐 99칸짜리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 대궐 밖 조선 제일 큰 집이었다는 강릉 선교장에 도착했다.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팜플렛을 읽어 보았다.
ㅡ효령대군의 후손인 가선대부 이내번(1703~1781)이 충주를 떠나와 이곳 강릉, 경포호수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잡았다.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조선의 풍류와 시인, 묵객들이 구름같이 찾아와 백여 년 동안 꾸준히 건물을 증축하여 현재의 선교장이 되었다. 손님 접대에 후하여 아낌이 없고 만석꾼 부호임에도 겸손하며 소작인들에게 배고픔을 모르고 살게함을 상생의 원칙으로 삼아 하늘에 덕을 쌓았으며 그로 인해 아직도 건재함이 천복이라고 일컬어진다.ㅡ
깨끗이 잘 보관되어 있는 외양을 대하니 아스라이 스러져 간 그들의 기상과 기품이 사철 끊이지 않는 방문객들을 반기는 듯하다.
300년 전통의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08학번인 대학생 아들의 어느 여름 방학, 남편과 셋이서 여름휴가를 맞아 들렀던 곳, 아들이 찍은 남편과 나의 사진을 커다란 패널사진액자로 만들어 오랫동안 거실 한복판에 걸어두기도 했다. 사진을 본 친구들은 그곳을 너희 시댁이라 말하라 했다. 우리 둘의 여름휴가 의상이 텃밭 패션이라고ᆢ.
그 여름에는 연못가에 심어진 배롱나무 붉은 꽃이 넓은 정원의 주인공이었다. 지금은 왕성한 성장을 거두어들인 쇄락한 초록들이 사방 가득하다. 눈에 띄지 않는 붉은 꽃도 단풍도 지금은 시절인연이 아닌가 보다.
이 오래된 공간에 머물렀던 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은 지금은 어느 시공간의 일부가 되어 존재할까? 단지 개개인의 추억으로만 사라져 가는 것일까? 우리들은 어디로 흘러갈까?
아롱아롱 다이아몬드빗방울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는 나뭇가지 끝 거미줄, 고옥 입구에 자리 잡은 현대식 카페. 발갛게 익어가고 있는 뒤뜰의 감, 뒤뜰 한 귀퉁이에 질서 정연하게 놓여 반짝이는 커다란 장독들. 사람도 부엌살림도 모두 텅 비어 냉기만 남아 있는 커다란 부엌과 긴 쪽마루. 곳곳에 걸려 있는 현판 속에 새겨진 독특한 서체의 다양한 글자들. 한때 시절을 논하고 정의와 우정을 얘기했던 그들의 뜨거운 기상이 아스라이 읽힌다. 애잔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10/14, 서울 - 경주 ( 09:28 ~ 11:04 )
10/15, 경주 - 부산 ( 09:12 ~ 10:26 )
10/16, 신해운대 - 강릉 ( 09:12 ~ 14:20 )
10/17, 강릉 - 서울 (15:20 ~ 17:25 )
문명의 이기, 핸드폰 덕을 톡톡히 본 3박 4일이다. 셋이서 밀어붙이는 바람에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여행 총무를 맡았다. 일정이 정해지자 빛의 속도로 내 계좌에 돈이 들어온다. 수입과 지출 기록, 깔끔한 결산 보고의 소임이 주어졌다. 번거로울 수도 있는 일을 평소에 전혀 쓰지 않았던 가계부 앱이 완벽하게 대신해 주었다.
뱅크샐러드.
오래전 아들이 깔아 주었지만 방치해 두었던 앱이다. 혹시나 해서 열어 보았더니 대박이다. 카드로 결제한 모든 금액이 매일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루 지출의 총액과 지불 상호, 소비 시간까지 일목요연하다. 그 기록을 보면 그날의 일정까지 다 파악되었다.
네이버 맵은 도보여행의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카카오택시는 승용차 대신 믿음직한 우리의 발이 되어 주었다.
카메라와 카톡에 남겨진 사진과 주고받은 대화들은 자세한 여행 일정을 상기시켜 준다. 지금처럼 기행문 글을 쓸 때 아주 유익한 길잡이가 된다.
함께해 준 친구들은 물론이고 이번 여행의 충실한 동반자가 되어 준 핸드폰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헤어지기 전 서로에게 다짐한다.
앞으로 5년만 즐겁게 다니자.
그래 5년만.
내년에도 5년만, 후 내년에도 5년만, 또 그다음 해에도ᆢ.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