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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Jan 29. 2021

오지랖이 넓은 것은 폭력이다 4

가족이나 친족 관계에서의 오지랖

 '주제넘게', '아무 일에나', '쓸데없이', '참견'

이 중 하나만 포함되어도 오지랖 넓은 것이다.

가족 관계도 예외는 될 수 없다.

오히려 가족 관계에서 자칫 오지랖이 더 넓어질 수가 있다.

가족이기에 주제가 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가족의 일이 어떻게 아무 일에 해당되느냐고 할 수 있고,

가족의 문제이니 당연히 쓸데 있는 것이라 여길 수 있고,

심지어 참견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가 있다.

이러한 생각이 결국은 생각지도 못한 큰 일을 일으키고 만다.


친할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숱하게 듣지만,

친하면서 예의를 잘 지키는 경우는 그리 많이 보지 못한 것 같다.

나부터도 친하면 말을 더 막하는 경우가 있다. 조심해야지...

어찌 보면 예의를 지키기 쉽지 않은 관계가 가족일지도 모른다. 

너무 편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가족관계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것이 '참견'이다. 

관심과 간섭의 구분이 참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관심인데 자식 입장에서 간섭이라 여길 수 있다.

제삼자가 볼 때도 분명 부모가 자식에 갖는 당연한 관심임에도 불구하고 

자식 입장에서는 간섭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함정이다.


결국 관심이냐 간섭이냐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자식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결정되어 버린다.

자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대화이다.

그런데, 요즘의 자식들은(이건 제가 부모이다 보니 순전히 부모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므로 오해가 없기 바랍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친구나 스마트폰과는 대화를 많이 하면서 부모와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래 놓고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언제 아빠가 내 마음을 알아주기나 했어?"라는 말을 한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대사이다.

말을 해줘야 아는데, 말도 해주지 않고서 이렇게 말하면 부모 입장에서는 너무 당황스럽다.

자식 입장에서는 "언제 말할 기회나 줬나?"라고 말할 수도 있을게다.

집집마다 부모가 더 그랬든, 자식이 더 그랬든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누군가가 조금 더 대화를 막았거나, 조금 더 대화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분명한 것은 대화의 부재에서 발생한 문제이다.

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관심이 간섭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줄 필요가 있다.


자식들에게 부탁한다.(자식 입장되어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부모 입장에서만 부탁함을 이해 바란다.)

"세상에서 너희 입장을 가장 많이 고려해줄 수 있는 사람, 너희 편에 서서 힘이 되어줄 사람은 부모이다.

어떻게든지 기회를 만들어서 부모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도록 해라. 진심으로 진지하게 부모를 믿고.

굳이 평균을 내보자면, 부모의 참견은 간섭보다 관심이 훨씬 더 많다.

간섭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자식에 대한 관심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다. 

간섭이라 여겨지더라도 일단 참견을 받아들이고 곰곰이 생각해본 연후에 

혹시 그래도 간섭이라 여겨지거든 즉시 말해라.

'그 정도는 제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요' 라고. 

부모도 사람인지라 간섭할 생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간섭하게 되고

조언을 하려 하다가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을 인정한다. 

참견을 하기 전에 최선을 다해 심사숙고하겠다"



그다음 문제가 '아무 일에나'이다.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관심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자라는 동안 부모는 일관된 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자식은 항상 자식이기에 어리게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아이가 자라는 것에 맞춰서 관심을 조금씩 줄여가야 하며, 

성장에 맞춰서 말의 내용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나라만큼 자녀를 오랫동안 돌보는 나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나라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지나치다.

자녀가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시키지 못한 경우가 내 주변에도 너무 많다.

성인 대접해주기를 원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성인은 자신에 대해, 자신이 한 것들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기본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아무 일에나' 관심을 가지고 참견을 한다.


유치원 다닐 때는 몸 단장부터 가방까지 다 챙겨주고 차 타는 곳까지, 혹은 유치원까지 데려다주어야 하지만,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스스로 알아서 할 수가 있다.

초등학교 때는 이것저것 공부할 것을 알려주고, 공부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읽을 책도 골라줘도 되지만

중학생만 되어도 이런 것 정도는 알아서 하기에 오히려 간섭이 될 수가 있다.

중고등학생 때는 집에 일찍 들어오라거나,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는 꼭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이미 이때부터도 이러한 말을 간섭이라 여기는 아이들도 있다.)

성인이 되어버린 자녀에게 아무리 걱정이 되더라도 이런 말을 하게 되면 결국 심한 간섭이 될 수 있고

이것이 하나의 단초가 되어 대화를 단절시키고 더 나아가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

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아무리 염려가 되고,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할지라도

자녀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에 맞는 관심을 가져야 하고, 조언을 해야 한다.

아무 일에나 관여해서는 안된다.


사실 나도 이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러려고 하는 마음을 제대로 잡아두고 있다.

조만간에 그러려고 하는 마음마저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자녀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던지 상관없이

자녀가 도움을 요청하면 대부분의 부모는 즉각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줄 준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이 때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과연 내가 도와주어야 하는가.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도와주어야 하는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유치원 생을 데리고 온 어떤 엄마가 아이가 곁에 있는 상태에서

"얘가 요즘 핸드폰을 너무 많이 하니 못하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

내가 이러한 교육을 잘해준다는 말을 듣고 온 엄마이다.

다른 엄마는 아이의 마음을 고려하여 아이 몰래 나에게 쪽지를 준다.

나는 다른 엄마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다 기억 속에 저장해둔다.

"핸드폰을 많이 하면 눈이 아파져서 주사를 맞아야 할 수도 있어"

이것도 사실 부당한 협박이지만, 이 말외에 아이를 설득할 방법이 없기에

아이가 겁을 먹지 않을 정도로 온화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한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아이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까봐 부탁하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말을 하지만

가장 하고 싶지 않은 말 중의 하나이다.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엄마와 함께 오면 엄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확실히 스마트폰 나온 이후로 부쩍 많아졌다.

문제는 엄마들이 한결같이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나에게 똑같이 말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나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초등학생만 되어도 주사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

핸드폰이 눈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내 말을 들을 리가 없다.

내 앞에서는 '알았어요' 하고 말할지라도 집에 가서 지켜질 리가 없다.

아주 드물게 내 말에 자극을 받아서 줄이는 아이는 있을 수도 있다.

초등학생에게는 "핸드폰 많이 해서 눈이 나빠지면 네가 가장 힘들지. 그러니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겠다"

중고등학생에게는 "엄마를 저렇게 걱정시키면 되겠냐. 이제 다 컸는데 알아서 잘해야지"라는 식으로 말한다.

어차피 내 말을 듣지 않을지라도 엄마가 부탁을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사실 이것은 주제넘게 쓸데없이 간섭하는 넓은 오지랖이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제발 나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으면 너무 고마울 텐데...

가까운 것을 오래 보는 것, 핸드폰에서 나오는 블루라이트 등이 분명 눈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이것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해당되고,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정확한 통계가 나온 것도 없다. 

심지어 나온 통계마저도, 

사람에 따라 미치는 영향이 다르고, 사람을 대상으로 집단 실험을 할 수도 없기에 완전하게 신뢰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넓은 오지랖이 되어버릴 수가 있다.

특히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더 그렇다.

그냥 검사만 하면 될 것을 괜히 엄마와 쿵짝이 맞아서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쓸데없이 남의 자식 일에 간섭하는 주제넘은 아저씨가 되어버릴 것임이 자명하다.


더 큰 문제는,

엄마가 아무 관련 없는 아저씨에게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버렸다고 엄마를 원망하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엄마가 맨날 핸드폰 하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것도 듣기 싫은데, 이제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것을 말해서 나를 난처하게 하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쁜 아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들 수 있는 너무 당연한 생각이 아니겠는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가 있다.

그러므로 부모는 어느 정도 자란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 

자녀에 대한 어떠한 얘기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얘기를 쓸데없이 해서 아이로부터 원망을 들을 필요는 없으니까.

설령 좋은 얘기라 할지라도 아이는 부담을 가질 수가 있다.


부모는 자녀에게서 관심을 거두어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자녀가 자랄수록 이 어려운 과제를 꼭 해결해야만 한다.

결혼하기 전에는 자녀의 배우자가 될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너무 당연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이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니까.

물론 독신주의라면 고민할 필요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한 자녀의 일에 참견을 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요즘에는 처가살이를 한다고 한다.

시집살이건 처가살이건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결혼을 했으면 둘이 알아서 사는 것이다.

남편이건 아내건 둘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각각의 본가로 가지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


설령 가지고 오더라도 둘이 해결하라고 돌려보내야 할 일이다.

단지, 자식이 도움을 요청했으므로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

내 며느리나 사위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지적하며 자식과 쿵짝을 맞출 것이 아니라,

내 딸이나 아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지적하고 가르쳐야 한다.

'감히 내 딸을, 내 아들을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라는 생각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더라도

자식에게는 절대 감정을 들키지 말고, 자식이 잘못한 것을 찾아내 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해결책을 조심히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적당한 오지랖이다.


가족 관계에서 오지랖을 적당히 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부모 자식 사이도 그렇지만 부부관계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적당한 오지랖을 부려야만 한다.

조금도 넓어져서는 안 된다.

그 어느 관계보다도 더 적당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모두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중요한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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