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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Feb 01. 2021

오지랖이 넓은 것은 폭력이다. 마지막

'우리'의 이중성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왜 대한민국 사람이 유독 더 오지랖이 넓을까?(사실 다른 나라에 거의 가보지 않아서 비교해보지는 않았기에 이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 내가 느끼기에는 유독 넓은 것 같다.)

왜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보다 오지랖이 더 넓을까?


'우리'라는 단어의 이중성 때문이다.

참 좋은 단어이다.

공동체에서 이만한 단어는 없다.

함께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 단어가 들어가는 말을 들으면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단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이 보다 더 나은 단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누구'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인정받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단어 때문에 오지랖이 넓어진다.

이 단어 때문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도 마치 오랫동안 봐온 것처럼 간섭하게 된다.

'우리'라는 단어에는 대한민국 아니, 삼국시대 그 이전부터 형성되어 온 민족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외세 침략을 900번을 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일 민족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이방인, 특히 더 못 사는 나라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유독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단합에는 좋으나, 이 속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도 심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끼리 어때서' 

이 말도 자칫 폭력이 될 수도 있다.


'our wife'는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우리 아내'라는 말이 있다.

이때의 '우리'는 '나'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게 혼용되는 나라가 우리 나라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나가 되고 나가 우리가 되는 일이 벌어진다.

우리가 나이니 내가 너의 일에 오지랖을 넓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지랖을 넓히지 않으면 인정머리가 없는 것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은 오지랖이 정도껏 있는 것이 인정머리가 있는 것이다.


너무 아파서 입원한 사람에게 병문안을 가지 않는 것은 '우리'를 범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당연히 걱정이 되고, 잘 치료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몸도 가누기 힘든 사람에게 병문안 가는 것은 내 관점에서는 폭력으로 보인다.

아파서 일어나기도 힘든 사람에게 병문안을 가서 한참 동안을 함께 하는 것은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은 후에 찾아보는 것이 예의이다.


오지랖이 있는 것과 넓은 오지랖을 갖는 것에 대한 정도의 차이를 제대로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지랖이 넓은 것보다 차라리 오지랖이 없는 것이 기본은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악플은 아주 넓은 오지랖에 해당된다.

주제넘게, 아무 일에나,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에 쓸데없이 엄청난 간섭을 한 것도 부족해서 아주 심한 욕지거리를 늘어놓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구인 광고에 "가족처럼 일할 분을 모십니다"라는 문구가 꽤 많이 들어가 있었다.

그만큼 따뜻하게 잘 챙겨주고 잘해준다는 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가족처럼 대한다.

가족이니까 보수를 좀 덜 주더라도 열심히 일해야 하고, 가족이니까 함부로 대하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

고용주는 가족처럼 대해주지 않으면서 직원에게는 가족처럼 하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이러한 문구가 있으면 아예 가지를 않게 되었다.

게다가 요즘 젊은이들은 가족처럼 대해주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가족처럼 대해주는데 그만두고 싶을 때 냉정하게 그만 두기도 좀 그렇기 때문이다.

조금 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져서 참견을 받기 싫어서이기도 하다.

가정에서조차 집에 함께 있어도 어느 정도 크면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일을 하기 때문에

서로 얼굴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문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아직도 모르고 써놓은 곳이 있긴 하지만.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다 보니,

오지랖을 넓게 부리는 일이 당연히 줄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문제는, 아예 오지랖이 없거나, 적당하지 않게 조금의 오지랖만 있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지랖이 넓은 것은 분명히 폭력이다.

상대방이 거부하기도 힘들고, 화도 낼 수 없는 폭력이다.

오지랖은 최대한 줄여야만 한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적당한 오지랖은 있어야만 한다.


주제넘지 않게, 꼭 관여할 일에만, 쓸데 있게, 간섭을 뺀 참견을 하는 것이다.

오지랖에 대한 글 1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읽어주신, 

적당한 오지랖을 가지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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