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첫 울음
"엄마"
나는 다급하게 엄마를 불렀다.
"바쁜데 왜 불러"
"아가가 이상해요"
6평 남짓한 가게에 딸린 5평 정도 되는 작은 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가게와 방을 다 합해도 주인집 큰 방보다 작은 거처였다.
1남 3녀였는데, 나보다 11살 많은 바로 위 누나는 집에 없었다.
예전엔 낳은 후에 원인 불명으로 죽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만약 모두가 잘 자랐다면 2남 5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도 장남의 굴레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인데.
11살 많은 누나 위로 형과 누나가 있었는데 둘 다 너무 어릴 때 하늘로 갔다.
내 밑으로 여동생 둘이 있었는데 내가 8살이던 어느 날 또 한 명의 여동생이 태어났다.
얼마나 예쁘든지. 학교에 다녀오면 나는 아가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정말 천사가 이 땅에 내려왔다면 바로 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천사가 땅이 싫었는지 걸어보지도 못하고 하늘로 가버렸다.
죽음이 정확히 뭔지도 모를 8살의 나는 움직이지 않는 유선이를 보며 엉엉 울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가 젖을 물리고 있다가 손님이 오면(시장에서 장사를 했었기에) 바로 빼고 뉘어 놓아도 울지도 않고
다시 젖을 줄 때까지 기다렸던 천사.
하루 종일 나의 장난감이 되어 주고 방긋방긋 웃으며 기어 다니던 아이가
아무리 흔들어도 눈을 뜨지 않고 까꿍을 수없이 해도 웃지 않았다.
그 아이를 작은 이불에 싸서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산소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버지는 할머니 산소 옆에 땅을 파고 그곳에 유선이를 묻었다.
다시는 유선이를 볼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엉엉 울었다.
유선이 묻지 말라고, 제발 유선이를 계속 보게 해 달라고..
그날따라 하루 종일 굵은 비가 내렸다.
할머니 산소가 걸어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는데 오고 가면서 나는 계속 울었다.
지금은 유선이의 묘도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할머니 묘를 이장하면서 유선이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관도 짜지 않고 그냥 이불에 싸서 묻어버려 형체도 찾을 수가 없다.
지금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이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지금도 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많은 아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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