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삶의 속도가 버거워

조금만 천천히 갑시다

by 의석

작년 딱 요맘때 제주도에 갔었다. 일종의 도피였다. 일로부터,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3박 4일은 3분 4초처럼 지나갔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는지 너덜너덜 나가떨어진 나 자신을 추스르기 바빴다. 급격하게 나빠진 컨디션에 방에 누워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럴 거면 여기까지 왜 왔지 싶으면서도 창 밖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일상의 전원을 끄고자 했지만 내가 끄고 싶다 해서 바로 스위치가 내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끼익끼익. 이 곳의 속도에 맞추어 보려는 내 몸부림에서는 녹슨 쇳소리가 났다. 휴식에도 연습과 적응이 필요한 사람, 그게 바로 나란 사람이니까.


올라오기 전날 밤이 되어서야 어색함이 가셨다. 그 전까지는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나를 좀 제대로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올라가야 하다니. 이상하게 그 곳에서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 혼자 있어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짧은 여행이기 때문이라고? 글쎄..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혼자서도 다녀볼 만큼 다녀 본 경험 상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환경의 차이인 것 같다. 그 곳의 속도, 삶의 방식, 그리고 바다. 바다는 어쩌면 나에게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환경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더하자면 역시 사람. 엄청 반가운, 그리고 힘 나는 만남도 있었다. 굳이 이 시기에 여기까지 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제주 바다.JPG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다


다시 서울. 집에 오는 길, 모든 것이 왠지 모르게 과했다. 지나치게 빠르고 복잡한 느낌이었다. 현기증이 났다. 참 얄궂다. 며칠이나 있었다고. 고거 며칠 있었다고, 서울에서의 삶에 멀미가 날 것 같다. 서울은 나에게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 10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한 건 나일까 아니면 이 도시일까.


재미있는 게 다른 나라(특히 소위 선진국들)에도 이런 비슷한 느낌을 갖는 사람이 많다. 미국이라면 뉴욕, 영국이라면 런던, 이탈리아라면 로마.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기에 이 대도시들은 빠르고, 정이 없고, 우리로 치면 '서울 깍쟁이'들이 사는 곳이다. 프랑스에 살았던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르도나 리옹 같은 중남부 사람들은 파리 사람들이 너무 차갑고 도시 분위기가 삭막하다고 여긴단다.


하긴 해외 살 때나 한창 출장 다닐 때 떠올려보면 그랬다. 언젠가, 그 때도 4월이었던 것 같은데, 필리핀 작은 도시의 공원을 거닐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현지인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동남아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음식도, 날씨도, 바다도 아닌 이들의 '삶의 속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동남아에서의 나는 마냥 신나고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왠지 모르게 늘 마음이 편했다. 그들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여유가 나를 안심시켰던 건 아니었을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뭐 특별하다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 공원에 모여 있는 한국인들에게선 이런 인상을 받을 수 없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뭐랄까, 여가시간조차도 '소비'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요즘에야 코로나 때문에 비행기 탄 지도 제법 되었지만 (근 10년 내 이렇게 오랫동안 공항에 가지 않은 적도 처음인 듯) 한국 밖에 있을 때면 항상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저들보다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은 무엇일까.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살자고 다들 외쳐대는 세상이지만 시스템의 속도가 변하지 않으니 다르게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살기 위한 노력 역시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어떤 '과제'같기만 하다.


왠지 뒤처진 듯한 느낌에 남들처럼 살아보겠다고, 따라잡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한 게 벌써 몇 년 째일까. 매일매일 끊임없이 무언가 증명해내야만 하는 삶을, 그토록 지긋지긋해하면서도 나는 반복한다. 오늘, 내일, 다음 주의 숙제들, 단지 그것들을 해치우기 위한 '방법'을 바꾸는 것으로 근본적인 공허감을 채울 수는 없다.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삶에서 풀 필요가 없는 숙제를 과감하게 내려놓기엔 여전히 겁이 난다. 그래, 겁이 난다.


서울 야경.JPG 이 도시를 향한 마음은 애정과 애증 사이 어딘가를 맴돈다


삶이 나에게 다시 달리라 말한다면, 나는 아마 숨을 고르고 끈을 고쳐 달릴 채비를 할 것이다. 아직은 그 목소리를 무심한 척 흘려보낼 자신이 없으므로. 그러나 출발선에서 한 마디 건네보련다.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 그래도 괜찮지 않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