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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이아데스 Jan 20. 2024

편지함 속 노을

신이 있든 없든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1년 넘게 문이 닫혔던 그 할머니 집 담장이 무너졌다. 골목에 있는 오래된 집. 부서진 담벼락 너머로 종이 상자, 거미줄, 벽에 걸린 무채색 옷가지가 보인다. 그 시간 동안 계절을 이어간 잡초들이 속절없이 말라 있다. 금이 가 있던 담장은 세월을 견딘 할머니의 뼛속 마냥 시리다. 앙상한 감나무 아래로 내 마음이 털썩 내려앉았다.


동네에서도 눈에 띄는 분이었다. 구부정한 허리, 작고 마른 몸으로 유기견 여러 마리를 데리고 다니셨다. 짐이 가득한 수레를 밀면서 개울 옆 텃밭과 우리 집 앞을 한동안 오갔다.  

어느 봄날, 텃밭에 있던 나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할머니였다. 목마르다며 물 한 잔 달라고 하셨다. 빚져 있던 사람처럼 큰소리로 대답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물과 빵을 서둘러 담아 건네고는 할머니의 수레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열린 작은 상자에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늘 싣고 다니던 종이 상자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딸에게서 온 편지들이라 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결혼해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자주 편지를 보낸다고 했다. 편지를 싣고 다니는 건 습관이라며 웃으셨다. 글을 잘 못 읽는다고 하셨다. ‘전화면 되는 세상에 손 편지라니 게다가 글을 못 읽으시다니’ 잠깐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런저런 얘기로 할머니와의 대화가 편해졌고 환한 봄 햇살은 더욱 빛났다.

그 이후 몇 번 더 우리 집에 오셨고 안부를 주고받았다. 추운 계절로 들어서면서 할머니의 모습은 뜸해졌고 수레를 끄셨지만, 거동은 불편해 보였다. 창밖으로 할머니를 물끄러미 기다리기도 했다.

새로운 봄이 올 즈음, 할머니 집 앞에서 가던 길을 멈췄다. 낡은 대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텃밭 준비를 곧 하시겠지’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녹이 슨 우편함을 들여다보았다. 편지는 없었다.

비에 맞아 뭉쳐져 있던 편지, 열어보지도 않았던 편지. 할머니 삶의 끈은 편지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이 할머니의 희망이고 에너지였을 것이다. 딸의 관점에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엄마에게로 가는 여정이 아니었을까.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지난 추석 명절, 정육점에서 만난 할아버지도 생각났다. 거동이 불편하신 모습으로 입구로 들어오시길래 문을 열어드렸다. 할머니 제사에 올릴 소고기라 했다. ‘자식은 없으시나?’ 입 속에서 맴돌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순서를 양보하고 먼저 나가시는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걸어가시는 모습 뒤로 파란 가을하늘이 느릿느릿 동행했다.


흑백 영화 ‘토리노의 말’에서처럼 삶은 마지막을 향하는 아무 의미 없는 여정일까. 화면을 가득 채운 불협화음의 음악과 세찬 바람 소리. 짧게 살다가 떠나는 우리는 그저 허망한 존재일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영화와는 다른 인생의 느낌을 받았다. 묵혀온 사랑을 품은 오래된 모습이랄까. 나 역시 세월에 허둥지둥 붙들려가는 나이가 되었지만, 시간이 켜켜이 녹아든 그들의 모습에서 존재 자체로도 은은히 빛나는 그 무엇이 느껴졌었다.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의 가치를 올려주는 것’이라 했다. 할머니의 지난한 일상 속 편지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고의 사랑, 아가페.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 쉽게 잊히는 사랑이 만연하고 이득이 없으면 바로 손절하는 세상에서 어쩜 나조차도 진정한 사랑을 모르고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우리 각자는 삶에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감에 이리저리 뛰어다니고만 있지 않은가. 인간은 존재 자체로도 아름답다는 걸 모르면서.


이미 폐가가 되어 쓰러진 집 앞에 다시 섰다. 할머니의 특별한 우주가 느껴졌다.

따뜻해진 노을이 편지함 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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