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억 년 전 공룡들이 세상을 활보하던 백악기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식물이 나타났다. 볼록하게 시작해 끝이 뾰족한 조그만 털북숭이 꽃눈을 가지 끝에 매단 나무였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꽃눈은 시나브로 자랐다. 햇살이 닿은 남쪽 부위가 그렇지 않은 부위보다 더 튼실하게 자랐다. 자랄 대로 자란 꽃눈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나무가 잎을 내기도 전에 북쪽을 향해 꽃잎을 뿜어냈다. 어떤 꽃에는 예닐곱 장의 두툼한 꽃잎이 하늘을 향해 피워 올랐고 어떤 꽃에는 열대여섯 장의 가느다란 꽃잎이 낭창거렸다. 눈처럼 새하얀 꽃잎을 달린 꽃이 있는가 하면 분출하는 용암처럼 붉은 꽃잎이 달린 꽃도 있었다. 그제야 공룡들은 새로운 식물, 목련의 출현을 알게 되었다.
아직 새벽의 찬 공기가 싸늘하게 느껴지던 4월 초 토요일에, 나는 K 쌤과 H 쌤과 함께 태안에 있는 천리포수목원을 찾았다. 수목원에서 개최한 ‘가드너와 함께 걷는 비밀의 목련정원’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서. 8시에 시흥시 중앙도서관에서 출발해서 프로그램이 시작하는 11시에 도착하기까지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도나도 꽃구경을 나선 모양인지 고속도로 진입로부터 막혔다. 막히는 도로를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서 가다 서다 하다 보니 11시가 훌쩍 넘어 수목원에 도착했다.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해서 3시 프로그램 참가로 변경해 놓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생선구이 정식으로 배를 채우고 맨 나중에 관람하려 했던 밀러가든으로 향했다.
밀러가든은 천리포수목원에서 상시 개방하는 구역으로 수목원 전체 18만 평 중 2만 평을 차지한다. 안내소를 거쳐 돌계단을 내려서니 ‘큰연못’이 나왔다. 연못가를 따라 목련들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고 길가를 따라 수선화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작은연못’을 지나 민병갈추모정원에 도착했다. 민병갈 원장이 잠들어있는 태산목 목련, 민병갈 원장 흉상, 완도호랑가시를 지나 민병갈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다는 라스프베리 펀 목련 앞에 섰다. 이역만리에 떨어져 살았던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민병갈 원장의 마음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추모정원에서 습지원으로 향하는데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K 쌤이 “무슨 개구리 소리지? 스피커를 틀어놓은 것이겠지!”라고 했고 나와 H 쌤도 그러려니 했다. 민병갈 기념관을 거쳐 수생식물원에 도착하자 다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기도 스피커를 틀어놓았네. 저기 바윗돌 아래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저기 물속에 개구리가 보여. 연출한 모형 아닐까?” K 쌤이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그러자 미동도 없던 개구리가 조금 움직였다. “진짜 개구리네. 움직이잖아.” 그랬다. 민병갈 원장이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자 환생하고 싶다고까지 한 개구리가 “개굴개굴” 울어댔던 것이었다.
수생식물원 옆에 있는 희귀·멸종위기 식물 전시원에서 큼지막하게 만든 동백꽃에 둘러싸여 사진을 찍었다. 길을 재촉하니 민병갈 원장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셋은 만면에 웃음을 띤 민병갈 원장을 가운데 두고 찰칵! 호랑가시나무원을 지나 동백나무원에 다다르니 천리포해수욕장이 보였다. 해수욕장을 뒤로하고 울타리를 따라가니 노을쉼터에 이르렀다. 가까이 있는 낭새섬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옅은 해무가 끼어 바다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 찾을 때 멋진 석양을 기약하며 출구를 향했다.
밀러가든 입구에서 700미터 가량 떨어진 에코힐링센터에 도착한 건 3시 15분 전이었다. 우리 셋 말고도 프로그램을 예약한 몇몇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우리를 비밀의 목련정원으로 안내할 가드너가 보조원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가드너의 명찰을 보니 SDY이라는 이름 석 자가 새겨 있었다. 삼십대 중후반정도의 나이에 건장한 체격으로 갈색 목련축제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검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자기는 수목원에서 일하는 사원이며 수목원 전역에 활짝 핀 그 많은 수선화를 자신의 책임 하에 식재했단다. 물론 혼자 한 건 아니고 교육생들과 함께 했다고 덧붙이면서. 나중에 취재해 보니 식물번식팀에서 온실, 묘포장의 식물과 시설, 수목원 전체의 관수설비와 수자원을 관리하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보조원은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수목원 전문가 교육을 받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NJH(남쪽에서 피어나는 향기라는 의미의 이름)라는 이름이 목련꽃 향기를 떠오르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명 가량의 참가자들은 가드너의 인도 아래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갔다.
목련정원에 비밀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왜일까? 수목원에는 7개의 정원이 있는데 연중 관람이 가능한 밀러가든을 제외한 6곳은 연구와 보존 등을 목적으로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들을 무척이나 아꼈던 민병갈 원장은 살아생전 수목원을 개방하지 않았다. 나무들이 훼손될까 우려해서였다. 민병갈 원장이 타계하고 수목원 재원 조달이 어렵게 되자 일부인 밀러가든을 일반에 개방했다. 목련정원도 목련이 만개하는 3월 말에서 4월 말까지 한시적으로나마 예약제로 일반인의 관람을 허용했다. 민병갈 원장이 살아있었다면 아직도 수목원 전체가 베일에 싸여 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가 가드너와 함께 목련정원을 걷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언감생심!
목련정원 관람은 에코힐링센터 바로 앞에 펼쳐진 무궁화동산에서 시작했다. 가드너는 수목원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식물인 무궁화를 설명했다. 무궁화의 계통에는 배달계, 홍단심계, 백단심계, 청단심계, 아사달계가 있으며 무궁화동산에 350여 분류군의 2500여 그루가 식재되어 있고 했다. 청단심계 무궁화 사진을 보니 약간의 푸른 빛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질문에 꽃에 청색을 내기 위해 교잡에 교잡을 더해 얻어낸 게 이 정로라는 가드너의 답변. 무궁화 꽃이 활짝 피는 5월에 무궁화 축제를 준비하고 있으니 많이 참석해달라고 덧붙였다.
가드너는 참가자들을 묘목장으로 인도했다. 비닐하우스로 지어진 번식 온실에는 목련 묘목들이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목련은 주로 이미 심어진 나무에 접을 붙이는 접목 방식으로 번식한단다. 접목이 번식이 빠르고 꽃을 빨리 볼 수 있다고. 수국이나 무궁화 같은 맹아력이 강한 식물들은 가지를 꺾꽂이하는 삽목 방식으로 번식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번식 온실을 지나 바로 옆에 있는 묘포장으로 갔다. 번식 온실에서 어느 정도 자란 묘목들은 야외에는 크게 키우는 곳이었다. 이랑에는 쭉쭉 자란 수많은 목련이 꽃을 활짝 피워내고 있었다. 목련들은 차차로 수목원 곳곳으로 옮겨 심을 예정이라고 했다.
묘포장 옆으로는 회양목이 길을 따라 담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얗게 핀 회양목 꽃을 보고 가드너는 벌들이 꿀을 따러 많이 찾는 꽃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런데 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연유냐고 물었더니 지금 벌들은 번식 온실에 활짝 핀 호랑가시나무 꽃으로 몰려가 있다나. 호랑가시나무라고 하면 사철 푸른 뾰쪽한 잎과 빨간 열매만 떠올랐는데. 가드너는 하얗게 핀 호랑가시나무 꽃은 그렇게 예쁘지는 않다고 했다. 꿀을 듬뿍 담고 있는 회양목 꽃이나 호랑가시나무 꽃이 인간의 눈에는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는 꽃이 아니겠지만 벌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자들은 가드너를 따라 묘목장을 나와 야트막한 산등성이로 이동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나무들과 꽃들에 대해 가드너에게 질문하고 설명을 듣는 산행이 계속되었다. 군데군데 꽃을 피운 목련이 보이기는 했지만 밀러가든이나 묘포장에는 한참 못 미쳤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쉬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목원의 식물들은 수목원 전역에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심어 기른다고 했다. 한곳에 모아 기르면 병충해나 기상재해에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민병갈 원장이 수목원을 만든 이유가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수목원의 주인은 잠시 왔다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무들인데 나무들 보고 왜 내 눈을 즐겁게 해주지 못하느냐고 따져 물은 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참가자들이 못내 아쉬운 기색을 보이자 가드너는 마지막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 기다리고 있다며 다독였다.
한 시간 가까운 산행을 마치고 내려가자 기와집 두 채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민병갈 원장이 생전에 거주했던 후박나무집이고 다른 하나는 민명갈 원장이 미국에 사는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해 지었다는 목련집이라고 했다. 후박나무집에 비해 훨씬 크고 멋지게 지어진 목련집을 보니 사모한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여생을 보내려 했던 민병갈의 마음이 느껴졌다. 민병갈 원장의 소원은 1996년 어머니가 101세로 별세하면서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후박나무집 옆에는 껍질의 색이 붉은 배롱나무가 있었다. 이름표를 보니 적피배롱나무였다. 가드너는 비가 오는 날이면 나무에서 핏물처럼 붉은 물이 흘러내려 으스스했다고 엄살을 부렸다. 후박나무집 담장을 돌아 내려와 길을 건너니 번호키로 잠긴 철문이 나타났다. 가드너는 지금까지 이곳을 보기 위해 돌아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가드너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어선 곳은 목련이 아름답게 꽃을 피워 ‘목련동산’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민병갈 원장이 목련을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하려고 만들었다고 해서 ‘밀러의 정원’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목련동산에는 30여 종의 목련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목련 ‘단 싱’, 목련 ‘불칸’, 큰별목련 ‘투 스톤스’, 큰별목련 ‘매그스 피루엣’, 목련 ‘그린 다이아몬드’, 큰별목련 ‘레너드 메셀’, 목련 ‘14캐럿’, 큰별목련 ‘도나’, 목련 ‘쿨 카시스’, 별목련 ‘던’, 목련 ‘갤럭시’, 목련 ‘핑크 가블렛’, 별목련 ‘크리산테미플로라’, 목련 ‘얼리로즈’ 등등. 목련 사이사이의 빈 곳은 샛노란 꽃이 만개한 수선화와 빨간색, 보라색, 하얀색, 연노랑 히아신스가 채우고 있었다.
목련으로 아름답다고 이름난 곳이어서인지 방송국에서 나와 촬영 중이었다. 하얗고 붉은 목련꽃을 배경으로 파란색 저고리와 감색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을 찍고 있었다. 피디인 듯한 사람이 KTV에서 왔다며 참가자들이 자연스럽게 관람하는 모습을 담고 싶다고 했다. 가드너는 참가자들의 의견을 묻고 괜찮다고 했다. 나중에 궁금증이 일어 KTV에 연락해보니 프로그램은 〈국악 우리가 잇다〉이었고 촬영 모델은 박자희 국악인이었다. 사십 세의 완숙기에 접어든 소리꾼과 무르익어 피어나는 목련과 잘 어우러질 듯싶었다. 피디는 5월 16일 목요일에 방영될 예정이니 시청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https://m.ktv.go.kr/program/again/view?program_id=PG2230053D&content_id=701514
목련동산 관람을 마치고 출발지였던 에코힐링센터로 돌아왔다. 가드너는 참가자들에게 사은품 봉지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봉지 안에는 수목원 꽃을 인쇄한 엽서 3장, 쿠키 2개, 기념품 가게 할인권 1개, 진달래 씨앗과 앵초 씨앗 각각 1팩이 들어 있었다. 집에 돌아와 묘판에 진달래 씨앗과 앵초 씨앗을 뿌려 놓았다. 아침저녁으로 마르지 않도록 물을 주는데 아직 싹이 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민병갈 원장이 외국에서 들여온 씨앗들을 발아시키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노력은 그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진달래와 앵초가 언제 세상에 고개를 내밀지 노심초사하는 마음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을 성싶다.
시흥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K 쌤과 H 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K 쌤의 ‘후광(後光)’ 이야기가 나에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K 쌤이 선을 보러 나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는데 K 쌤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후광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남자와 결혼했다고. 맞다. 꼭 후광이 부처님이나 예수님 같은 성인에게서만 나타나란 법이 있을까? 어쩌면 ‘가드너와 함께 걷는 비밀의 목련정원’ 프로그램에서 후광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짝 핀 목련꽃 하나하나에 지금까지 못 느꼈던 기운들이 어려 있었고, 투박하지만 열정적으로 해설한 SDY 가드너의 미소 짓는 얼굴에 밝은 오라(aura)가 깃들어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