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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Oct 15. 2021

나 헤밍웨이야!

잠이 오지 않아 컴퓨터를 켠다. 자정이 훌쩍 넘은 한밤중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맞은편 동 전체가 깜깜하다. 글쓰기 숙제를 하려고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연다. 막 떠오른 첫 문장을 입력하려는데 핸드폰 벨이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알지 못하는 번호다. ‘누군가 잘못 걸었나 보네.’ 거절 버튼을 누른다. 잠시 후 다시 벨이 울린다. 같은 번호다. ‘누구야, 대체. 잘 못 걸었다고 알려줘야겠네.’ 응답 버튼을 누른다. 

    

나_여보세요?

헤밍웨이_나 헤밍웨이야!

나_예? 뭐라구요? 지금 장난하세요?

헤밍웨이_이봐, 지금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시간이란 말이지.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할 말도 있고 해서 전화를 걸었어. 그러니 잘 기억했다가 다른 사람들 알리라고, 응?   

  

속으로 ‘별 미치광이가 다 있군’ 했지만 잠도 오지 않는데 잘됐다 싶다.

     

나_뭔데요?

헤밍웨이_내가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말을 했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맞아?

나_글쓰기 수업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데, 근데 말끝마다 반말이에요?

헤밍웨이_내가 네 할아버지뻘인데, 왜, 그러면 안되냐?

나_그럼, 그러세요.

헤밍웨이_난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라고 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는 게 맞겠군.

나_정말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는걸요.

헤밍웨이_내가 알아봤는데 아놀드 새뮤얼슨이란 녀석이 회고록에다 그렇게 썼다. 그 녀석은 내가 키웨스트에 살 때 찾아왔지. 나에게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아마 그때가 1934년 봄이었을 게야. 열 달쯤 같이 지내다가 떠났는데 그저 그런 작가로 인생 마감했어. 그런데 그 녀석은 1964년에 내가 자살하자 『헤밍웨이와 함께: 키웨스트와 쿠바에서의 한 해(With Hemingway : a year in Key West and Cuba)』라는 회고록을 섰지. 회고록에 문제의 구절이 있다. 한번 들어 봐라.  

   

글을 쓰는 데에 기계적인 부분이 많다고 낙담하지 말게. 원래 그런 거야. 누구도 벗어날 수 없어. 나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시작 부분을 적어도 쉰 번은 다시 썼다네. 철저하게 손을 보아야 해. 모든 초고는 쓰레기야(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자네는 온통 흥분되겠지만 독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하지만 작업 요령을 터득하고 난 후에는 독자에게 모든 걸 전달해서 예전에 읽어본 얘기가 아니라 자기에게 실제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게 하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해.  

   

그런데 회고록이 바로 출간된 게 아니라 그 녀석이 1981년에 죽자 그 녀석의 누이가 원고를 발견해 1984년에 출판했지. 1985년에 『에스콰이어』라는 잡지에서 문제의 구절을 인용하는 바람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 그전까지는 그런 말이 없었고.

나_그렇군요. 어쨌거나 새뮤얼슨에게 그렇게 이야기한 건 사실이잖아요?

헤밍웨이_글쎄다. 혹시라도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 녀석이 쓴 글을 보고 한 말이었을 수도 있지. 『미니애폴리스』 신문에 실린 그 녀석의 글은 정말 엉망이었거든. 아니면 그 녀석이 지어낸 말일 수도 있지 않겠냐? 그 녀석도 나름 작가였으니 말이다. 그 녀석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건 확실하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면 쓰는 사람만 혼자 신나고 독자들은 하나도 신날 일이 없겠지. 혼자 쓰면서 이와 즐거울 거면 타자기를 써. 그만큼 쉽고 재밌으니까. 글쓰기를 배운 다음 작가가 해야 할 일은 뭐겠어? 독자가 모든 요소와 감정, 시선, 느낌과 시공간을 느낄 수 있도록 글에 담는 거지. 이렇게 하려면 네가 써놓은 글을 첨삭하는 과정이 필요해. 이때 연필을 사용하면 네가 쓰려는 내용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해지는지 검토할 기회가 세 번 생겨. 원고를 고쳐 쓸 때 한 번, 첨삭한 내용을 타자기로 옮기면서 한 번, 마지막은 타자로 친 원고를 교정 볼 때. 연필로 쓰면 타자기로 치는 것보다 1/3 정도 개선할 기회가 늘어나는 거야. 야구선수 평균 타율로 0.333이면 엄청 좋은 거 아니냐. 이렇게 하는 동안 좀 더 익숙해질 테니 그만큼 고치는 것도 수월해질 거고.  

   

또 이런 말도 했었군.  

   

독자들은 서술을 읽기는 하지만 기억을 못 해. 네가 어느 날 벌어진 사건을 서술했다 치자. 독자들은 그 일이 벌어진 시점을 기억하고 나름 머릿속에서 사건을 재구성하겠지. 한 달이 지나고 시간이라는 맥락이 사라지면 네가 쓴 글은 독자들에게 재미없게 느껴질 거야. 독자들은 더는 사건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리지도 기억하지도 못해. 하지만 서술 대신 상상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더 풍부하고, 완벽하고, 견고하고, 실제처럼 만들 수 있어. 좋고 나쁘고를 떠나 네가 창조한 거야. 설명하려 들지 말고 상상을 하라는 말이야. 네가 상상해서 만들어낼 수 있을 만큼, 네가 아는 지식을 쏟아 넣는 만큼 네 글이 진실하게 느껴진다는 거지.  

  


확실하냐고? 당연하지. 그 녀석이 떠난 후 『에스콰이어』 1935년 10월호에 「작가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에게(Monologue to the Maestro: A High Seas Letter)」를 기고했지. 그 녀석이 나에게 했던 글쓰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정리한 글이거든.

나_알았어요. 잘 기억했다가 전달할게요. 

    

헤밍웨이_또 하나 있다. 내가 『노인과 바다』를 200번 퇴고했다는 말도 잘못 전해진 말이다.

나_정말요?

헤밍웨이_열린책들에서 나온 번역본의 해설에서 나온 말 때문일 거야. 번역자 이종인이 이렇게 썼거든. ‘결국 1951년 1월에 집필을 시작했고 8주 만에 탈고했으며 그 후 발표하기까지 2백 번이나 다시 읽으면서 일자 일구에 신경 써 문장을 가다듬었다.’ 아마 책 광고에 내가 한 말을 읽고 쓴 모양인데, 내가 한 말은 이렇다. 

    

내가 배운 것이 그 이야기 속에 있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평이하고 곧바르게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더라도 당신이 그것을 읽은 후에 오직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 그 책이 그러한 방식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특히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니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는 그 책을 2백 번 넘게 읽었고 그때마다 나는 책과 교감했습니다. 일생 해온 일을 마침내 마무리 지은 듯싶습니다.  

   

나_정말 다르게 와닿네요. 우리 속담에 ‘말이란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라고 했거든요.

헤밍웨이_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뭔지 알아? 퇴고 운운하면서 ‘노벨상을 받은 헤밍웨이도 자신의 초고는 쓰레기라고 했다. 2백 번 이상 퇴고해서 그만한 작품이 되었다’라는 말이야. 확실히 전하라고.

나_네, 확실히 전하겠습니다. 

    

헤밍웨이_하나 더 있다.

나_예, 하나 더요?

헤밍웨이_마지막이야. 

나_알았어요. 이야기해보세요.

헤밍웨이_사람들이 내 글의 문체를 ‘하드보일드(hard-boiled)’라고 하지. 하드보일드! 나도 맘에 드는 말이야. 그런데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에서 뭐라고 바꾼 줄 아냐? 냉혹기법.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어떤 사람은 비정문체라고 하더군.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은 쓰지 않을 거야.

나_뭐라고 하셨는데요?

헤밍웨이_단편집 『Winner Take Nothing(승리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라)』을 출판했을 때 장모님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이렇게 말했지.

     

저는 작품을 끝내기 전에 전 세계의 그림, 또는 내가 본 만큼의 그림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길게 늘여 빼지 않고 항상 압축시켜서. (I am trying to make, before I get through, a picture of the whole world, or as much of it as I have seen. Boiling it down always, rather than spreading it out thin.) 

    

나_냉혹기법이나 비정문체는 맞는 말이 아니네요. 굳이 바꾸자면 ‘압축문체’라면 어떨까요?

헤밍웨이_‘압축문체’, 뭐 나쁘진 않군. 더 적당한 말이 있는지 더 찾아보라고 사람들에게 꼭 전해.

나_예, 알겠습니다.   

  

헤밍웨이_이 밤중에 내 불평 듣느라 힘들었을 터이니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줘야겠군. 만화가 고우영이 『노인과 바다』 독후감을 어떻게 쓴지 아나?

나_잘 모르겠는데요.

헤밍웨이_바로 이렇게 썼지.

  

바다와 노인을 읽고 나서

   

용감한 다랑어(Tuna)의 투쟁기이다. 작가는 그 다랑어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인간에게 굴복하지 않은 것을 쓰고 있다. 늙은 어부는 다랑어의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된다.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작가는 하나의 중요한 과실을 범하고 있다. 상어를 나쁜 고기로 표현한 것이 그것이다. 상어도 역시 내가 다스리는 어족 아닌가?

전체적으로 바다와 물고기의 생리를 사실과 맞게 표현한 것만큼은 높이 평가돼야 할 것이다.

-용왕     

참 재미있는 작자야. 몇 해 전에 내가 있는 세계로 왔기에 불러서 같이 거나하게 취하도록 마셨지. 이봐, 듣는 거야? 이봐…….  

   

어디서 환청이 들리는 듯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컴퓨터를 켠 채로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꿈에서 누군가 뭐라 했는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개꿈인가? 출근하려면 이부자리에 가서 좀 자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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