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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티콘 Oct 14. 2021

서거정(徐居正)과 최부(崔溥)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이야기 (4)


1. 서거정과 『황화집(皇華集)』

     

서거정(徐居正)은 조선 전기 세종조에서 성종조에 걸쳐 형조판서, 좌참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서거정은 1420년(세종 2)에 태어나 1488년(성종 19)에 졸(卒)했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이다.

     

『성종실록』에 실린 「달성군 서거정의 졸기」에는 ‘최부가 이전에 왕명을 받들어 제주에 갔는데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 절강에 표착하였다. 황명으로 돌아오는데, 최부를 본 중국의 문인들은 반드시 서거정의 안부를 물었다.〔崔溥嘗奉命往濟州 遭風飄泊浙江 帝命遣還 中原文士見溥者 必問居正安否〕’라는 말이 나온다.

최부는 『표해록』에서 절강의 가흥부(嘉興府)를 지날 때인 2월 15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역승 하영이 시 세 절구를 지어주므로 신도 화답하였습니다. 하영은 채찬, 건계, 팔대어 등 물품을 특별히 가져다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정의 낭중 기순과 행인 장근이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황화집』을 지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시를 지어 화답했는데 서거정이 맨 첫줄에 있었습니다. 그의 시에, ‘영명한 황제께서 삼한의 일을 묻는다면, 문물과 의관은 상국과 같다고 하오’라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중략)

신이 말하기를, “기 낭중의 문장과 고매한 덕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바인데, 지금은 무슨 관직이며, 장 행인은 어떤 일을 맡고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기 낭중은 귀부 석천부의 지부로 폄직을 당하였는데, 지금은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장 행인은 죄를 받아 지금은 금의위의 군인으로 충당되었습니다.” 이어서 묻기를, “서거정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의정부 좌찬성입니다.” 하영이 말하기를, “서거정은 문장가로서 해동의 인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북경의 옥하관에 머무를 때인 4월 19일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해란 사람도 우리말을 알았는데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내가 사신을 따라서 당신 나라에 다녀온 것이 벌써 여섯 차례입니다. 서거정 재상께서는 잘 계시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서거정은 세종조에서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중국 사신을 접견하고 중국을 방문하였다. 아래에 그 내력을 정리하였다.

   

1450년(세종 32) 가을에 중국사신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을 맞아 술작(述作)하여 칭상(稱賞)받았다. 

1452년(문종 2) 겨울에 사은사(謝恩使)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에 가던 도중, 모친상을 당하여 되돌아왔다.

1457년(세조 3) 여름에 영접도감(迎接都監)을 겸하여 영종의 복위 조서(詔書)를 반포하러 온 중국사신 진감(陳鑑)과 고윤(高閏)을 맞아 수답(酬答)하였다.

1460년(세조 6) 여름에 사은사 부사(謝恩使 副使)로 중국에 가서 문명(文名)을 얻었다. 『북정록(北征錄)』을 지었다.

1476년(성종 7) 봄에 원접사 겸관반(遠接使 兼館伴)이 되어 중국사신 기순(祁順)과 장근(張瑾)을 맞아 수창(酬唱)하였고 『황화집(皇華集)』의 서(序)를 지었다.

1488년(성종 19) 봄에 관장(館長)이 되어 중국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을 접빈하였다. 

    

1476년(성종 7)에 원접사로 중국사신 기순(祁順)과 장근(張瑾)을 맞아 수창(酬唱)하였고 『황화집(皇華集)』을 지은 일을 위의 『표해록』 2월 15일 일기에서 중국 역승 하영이 언급하였다. 「달성군 서거정의 졸기」에는 그 때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병신년 에 낭중(郞中) 기순(祈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이 사신으로 오자,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기순은 사림(詞林) 의 대수(大手)로서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도로와 산천의 경치를 문득 시로 표현해 읊으니, 서거정이 즉석에서 그 운(韻)에 따라 화답하되 붓을 휘두르기를 물 흐르는 듯이 하며, 어려운 운을 만나서도 10여 편(篇)을 화답하는데 갈수록 더 기묘해지니, 두 사신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기순이 태평관부(太平館賦)를 짓자 서거정이 차운(次韻)하여 화답하니, 기순이 감탄하기를, “부(賦)는 예전에 차운하는 이가 아직 있지 아니하였으니, 이것도 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과 같은 재주는 중조(中朝)에 찾아도 두세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하였다.    


『황화집(皇華集)』은 조선의 원접사와 명나라 사신이 주고받은 시를 편집하여 간행한 시집이다.

명나라는 외국에 사신을 보낼 때는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의 원칙에 따라 원칙적으로 환관을 보냈다. 하지만 조선은 문화 수준은 여타의 나라와 현격하게 달랐으므로, 명나라는 황제의 등극이나 황태자의 책봉, 그리고 조선 임금에 대한 조문 등등 몇 가지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조정의 관원 중에서 문관을 선발하여 파견하였다.

명은 쇄국정책을 취했으므로 명의 사신들에게도 외국 여행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작시에 능했던 이들 문관 사신들은 조선 사행을 기념하기 위해 사행로를 따라 유람하면서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듯이 시를 지었다. 한편 조선에서도 문관 사신이 오는 일은 이례적인 일이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예우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리고 사신들이 남긴 시를 모아 일종의 기념문집으로 간행했다. 그러자 그 문집을 접한 후대의 사신들도 자신의 시도 문집으로 간행해줄 수 있는지 직간접적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문관 사신이 올 때마다 시문집을 간행했고, 이를 『황화집(皇華集)』이라 이름 하였다. 이 『황화집(皇華集)』에는 사신들의 시뿐만 아니라 조선 접반사의 시도 실려 있었다. 사신들 이 시를 지으면 이를 조선의 접반사에게 보이면서 화답을 요구하는 일이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사신의 시에 화답하기 위해서 문재가 뛰어난 관료를 접반사와 그 종사관으로 선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명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역시 문재가 뛰어난 이를 사절단으로 충원하여 보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집(皇華集)』의 간행은 국내외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명 사신과 조선 접반사가 서로 주고받은 『황화집(皇華集)』은 전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개인이 아니라 정부에서 직접 시문을 모아 편찬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신태영, 『皇華集』소재 한시의 특징과 양상-명 사신과 조선 접반사의 수창, 『동방한문학』 제42호, 2010)

     

2.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 등이 왕명으로 고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여 1485년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모두 382편의 사론(史論)이 있는데, 178편은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는 찬자 자신들이 직접 써넣은 것이다. 나머지 204편 중 반이 넘는 118편의 사론을 최부(崔溥)가 썼다. 물론 서거정과 다른 사신(史臣)들도 사론을 썼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안정복(安鼎福, 1712년(숙종 38)~1791년(정조 15))은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를 다룬 통사적인 역사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서(序)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동방의 역사도 갖추어 있다. 기전체(紀傳體)로는 김 문열(金文烈 문열은 김부식(金富軾)의 시호)의 《삼국사기》와 정문성(鄭文成 문성은 정인지의 시호)의 《고려사》가 있고, 편년체(編年軆)로는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와 최금남(崔錦南, 금남은 최부(崔溥)의 호)의 봉교찬(奉敎撰)인 《동국통감》이 있고, 이를 따라서 유계(兪棨)의 《여사제강(麗史提綱)》과 임상덕(林象德)의 《동사회강(東史會綱)》이 있으며, 초절(抄節)한 것으로는 권근(權近)의 《동국사략(東國史畧)》과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 등의 책이 있어 빈빈하게 성하다.

     

안정복은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서거정과 최부의 봉교찬(奉敎撰)이라 일컬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있어 서거정과 최부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다. 또 안정복은 서거정과 최부의 역할에 대한 평가도 내렸는데 사론에 비중을 더 두어 『동사강목(東史綱目)』 「고이(考異)」에서 서씨전(徐氏傳) 대신 ‘최씨전(崔氏傳)’을 실었다. 

    

최씨전 (崔氏傳)

《동국통감》은 여러 신하들이 왕명을 받들어 찬(撰)하였기 때문에 그 논단(論斷)에 있어 모두, 신 등은 상고한다〔臣等案〕고 되었다. 지금 금남(錦南) 최보(崔溥)의 문집(文集)을 상고하니, 사론(史論)은 모두 최의 소작이다. 최의 외손 곧 미암(眉菴) 유희춘(柳希春)이 그 문집을 편집하였으니, 미암은 박아하기 때문에 잘못이 없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은 모두들 《동국통감》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지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중서전(徐傳 서거정(徐居正)의 전(傳))의 그 저술(著述) 조에 《동국통감》이 있으니, 이 어찌 여러 신하들이 같이 찬술함에 있어 사가(四佳)가 총재(總裁)하고 금남(錦南)이 사론을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최씨 보(崔氏溥)로 쓴다. 《제강(提綱)》에도 역시 그러하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는 성종의 명을 받은 서거정 등의 훈신과 최부 등의 사림이 함께하였다. 왕권과 구세력인 훈구와 신진세력인 사림의 합작이라는 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연산조(燕山朝)부터 이어지는 훈구와 사림의 극심한 대립으로 일어나는 사화(士禍)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3. 서거정이 최부에게 보낸 시 

    

서거정의 사가시집(四佳詩集)에는 서거정이 최부에게 보낸 시들이 실려있다.  

   

최 교리(崔校理) 부(溥) 가 황감(黃柑)을 부쳐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謝崔校理 溥 寄黃柑〕     


相思日日憶湖南  그대가 그리워 날로 호남을 생각하건만

七十年來病不堪  칠십 나이 근래엔 병을 견디지 못하는데 

多謝故人心鄭重  친구의 정중한 마음이 몹시 고마워라 

一封書寄十黃柑  한 봉함 서신에 열 개 황감을 부쳤네그려  

   

최부는 1487년(성종18)에 1월에 홍문관부교리에 제수되었다. 이때 최부의 나이는 34세이고 서거정의 나이는 68세였다. ‘황감(黃柑)’은 노란 감귤이란 뜻인데 조선시대에는 제주 귤이 임금께 진상되면 먼저 종묘에 모신 선왕들의 영혼에 바친 뒤 신하들에게 나누었다고 한다. 최부는 자신이 받은 감귤을 노년의 서거정에게 보냈고 서거정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사례한 시로 보인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탐라(耽羅)에 가는 최 교리(崔校理) 부(漙)를 보내다〔送崔校理 溥 奉使耽羅〕     


嫋嫋秋風水自波  솔솔 부는 가을바람에 물결은 절로 이는데

送君千里動悲歌  그대 천리 길 보내려니 슬픈 노래 발동하네 

才名早著金閨籍  재주 명성은 일찍 한림원에 드러났는데

使節今乘銀漢槎  사절로는 지금 은하수의 떼를 타는구려

鯨海波恬開島嶼  큰 바다 파도는 잔잔해 섬이 환히 드러나고

鼇岑天襯老煙霞  한라산은 하늘에 닿아 뿌연 놀이 아득하리

平生自信仗忠信  평생 충신 두 자에 의존함을 자신하거니

遮莫魚龍出沒多  수많은 어룡 따위야 출몰하거나 말거나 

    

漢拏山色入雲齊  한라산 빛은 구름 속에 깊숙이 들어가고

日出扶桑聽曉鷄  동녘에 해 돋거든 새벽닭 소리가 들릴 텐데

利涉東溟凌汗漫  동쪽 바다 잘 건너서 큰 파도 헤쳐갈 게고

望依南斗欲攀躋  남두를 바라보면 부여잡아 오르고 싶으리

香傳橘柚黃金顆  향내는 황금 덩이 같은 감귤에 전해오고

貢入驊騮碧玉蹄  조공은 벽옥 같은 발굽 준마를 들이겠지

雪裏山茶開滿樹  눈 속에 동백꽃은 나무 가득 피었을 텐데

飛來無數翠禽啼  파랑새도 수없이 날아와서 울어댈 걸세 

    

天地東南象緯開  하늘땅 동남쪽으로 상위가 탁 트인 곳에

雲煙浩渺接蓬萊  구름 연기가 아득히 봉래산에 연접했으니

遠遊司馬憑豪氣  멀리 유람 간 사마는 호기를 부릴 터이고

奉使張騫仗大才  사명 받든 장건은 큰 재주를 의지하겠네

滄海泣珠秋月滿  창해는 구슬을 울어 가을 달이 둥글 게고

長風破浪晩帆催  거센 바람은 파도 헤쳐 저녁 돛을 재촉하리

可酬弧矢男兒志  호시에 담긴 남아의 뜻을 펴게 되었으니

俯瞰東溟小似杯  동해를 굽어보면 술잔만큼 작아 보일 걸세

     

慙予鬱鬱滯荒隅  한구석에 처박힌 답답한 내가 부끄러워라

磊落如君是丈夫  그대처럼 큰 뜻 펼치는 이가 바로 장부일세

不用浮沈騎款段  큰 배를 타지 않고 느린 망아지를 타고야

何如遊覽歷寰區  어떻게 온 천하를 두루 유람할 수 있으랴

爲停別酒論前事  위하여 이별주 술잔 멎고 지난 일을 논하고

更撫長刀惜壯圖  다시 긴 칼 만지며 웅장한 계획 진중히 하네

好是明春拚軟脚  정히 명년 봄 기다려 연각연을 베풀 적엔

杏花疎影倩人扶  살구꽃 그늘에서 부축받도록 취해나 보세  

   

1487년(성종18)년 최부는 제주 삼읍 추쇄경차관(濟州三邑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었다. 최부가 제주에 부임하기 위해 9월 17일에 대궐에서 하직하고 출발했다. 서거정은 제주로 떠나는 최부에게 네 수의 시를 지어 송별(送別)했다. 마지막 수에서 서거정은 늘그막 자신의 처지를 아쉬워하면서도 최부가 돌아오는 다음해 봄에 연각연(軟脚宴, 멀리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위로의 뜻으로 베푸는 주연)을 함께 하자고 했다. 하지만 최부가 중국으로 표류하는 바람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제주(濟州) 최 경차(崔敬差) 보(溥) 에게 부치다〔寄濟州崔敬差 溥〕 

    

滄海茫茫天一涯  아스라이 큰 바다 너머 하늘 한쪽 가이라

憶君時復費相思  그대 생각에 때로 그리움이 간절해진다네

相逢軟脚知何日  서로 만나 연각연 할 날이 그 어느 날일꼬

桃李春風二月時  봄바람에 복사꽃 오얏꽃 피는 이월일레라  

   

橘柚黃時雪正霏  감귤이 익을 무렵이면 눈이 한창 내리고

山茶花上翠禽飛  동백꽃 위로는 파랑새가 날아다니겠네

得詩已滿三千首  시 얻은 건 이미 삼천 수가 가득 찼겠지

去自堂堂得得歸  당당히 갔으니 자주자주 돌아올 걸세     


제주 최 경차(崔敬差)에게 부치다〔寄濟州崔敬差〕     


觀德亭前山似畫  관덕정 앞에는 청산이 흡사 그림 같고

朝天館下水浮空  조천관 밑에는 물이 하늘에 떠 있으리

奇遊萬里男兒事  만리 밖 신기한 유람은 남아의 일이라

應向扶桑早掛弓  응당 부상의 가지에 일찍 활을 걸겠지   

  

제주 최 경차(崔敬差)에게 부치다  

   

큰 바다 아득한 곳에 한라산이 우뚝해라 / 鯨濤浩渺漢拏山

봉래산 영주산이 지척의 사이에 있구려 / 蓬島瀛洲咫尺間

열 폭의 돛을 만 길 높다랗게 걸고 나면 / 十幅籧篨高萬丈

동풍이 사신의 배를 평온히 보내 줄 걸세 / 東風穩送使船還  

   

서거정이 제주 삼읍 추쇄경차관(濟州三邑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떠난 최부에게 보낸 시들이다. 서거정은 최부가 제주로 가는 뱃길이 안녕하기를 바라며 다시 돌아와 만나고 싶은 심정을 시로 전했다. 두 번째 시에 관덕정(觀德亭)이 나오는데 서거정은 관덕정 중수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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