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이 허용하는 첨부파일의 용량도 그 속도도 터무니없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한 두 개씩은 갖고 있는 USB(Universal Serial Bus)도 당연히 없을 때다. 다른 이에게 컴퓨터에 들어 있는 파일을 건네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것은 다름 아닌 3.5" 플로피 디스크였다. 그는 플로피 디스크, 흔히 디스켓(Diskette)이라 불리던 손바닥만 한 네모 모양의 그것을 세장, 나에게 건넸다. 그 녀석 한 장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은 1.44MB. MP3 노래 한 곡이 보통 3MB가 넘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노래 한 곡당 세 장의 디스켓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고 하나의 파일로 되어 있는 노래 한 곡을 그저 복사한다고 디스켓 세 장에 나누어 담아지는 것은 아니다. 압축 툴을 사용해서 한 파일당 1.44MB 이하의 용량으로 분할압축 한 다음, 세 장의 디스켓에 나누어 담아야 하고, 그걸 받아서 내 PC에 옮겨 사용하려면 다시 압축을 풀어야 그것이 하나의 파일로 만들어진다. 그걸 할 줄 아느냐고?
사실 어려운 일은 전혀 아니다. 같은 폴더 안에 압축을 풀기만 하면 하나의 파일로 만드는 건 지들이 알아서 하니까. 하지만 이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이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땐 그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회사나 학교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아직 가정에서까지 집집마다 PC를 보유하던 시절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 부모 세대에 TV가 그랬었던 것처럼.
집에 가져와 컴퓨터를 켜고, FDD에 디스켓을 넣으니 따락따락 소리를 내며 컴퓨터가 디스켓에 담긴 정보를 읽기 시작한다. 그 작은 용량의 파일 하나를 읽어내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FDD. Floppy Disk Driver의 약자로, 말하자면 데스크탑 컴퓨터에 장착되어 있던 디스켓 읽는 장치이다. 요즘엔 ODD(Optical Disk Driver), 그러니까 CD-ROM이 장착되어 있는 컴퓨터조차 찾기 힘든 시절이니, FDD는 당연히 그렇다. USB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후에 PC들은 USB 포트만 여러 개 장착되어 출시된다. PC에 내장되어 있지 않는 장치들도 USB 포트를 이용하여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사용빈도가 적은 드라이버들을 내장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잠시 후 세장의 디스켓에 있는 파일을 모두 컴퓨터로 복사했고, 압축을 풀었고, 하나의 MP3 파일로 예쁘게 만들어진 그것에는, ‘페이지-미안해요’라고 파일명이 적혀 있었다. 파일을 실행하니 스피커를 통해 노래가 재생되기 시작했고, 현악기의 선율이 풍성한 전주가 흐른 후, 고운 목소리의 여자 가수가 노래...... 아니 랩을 시작한다. 이 노래 뭐지?
페이지는 팝페라 성향의 발라드를 주로 부르는 프로젝트 그룹으로서, ‘칵테일 사랑’으로 유명한 마로니에 출신 프로듀서 김선민이 제작했다. 노래는 여성 객원 싱어가 하는데 1대가 오현란, 2대가 안상예, 3대가 이가은. 이후로도 몇 번 싱어가 바뀌었고 현재는 3대 싱어 이가은이 다시 합류했다고 한다. 내가 들은 건 2대 안상예의 목소리였다.
내가 놀란 것은 피아노와 현악기의 연주가 어우러진 전주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수의 특이하고 매력적인 목소리 때문이기도 했고, 클래식한 멜로디가 주를 이루기에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불어서 랩이 끝날 즈음 시작된 묵직한 바리톤의 성악 멜로디도 내 귀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노래 진짜 뭐지? 옷을 갈아입으면서 무심하게 노래를 듣던 나는 어느 순간 자리에 앉아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집중하고 있었다.
페이지의 ‘미안해요’라는 곡은 특이한 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우선 전주부터 시작해 곡 전체에 깔려있는 멜로디의 정체는 바로 클래식이다. 프랑스 음악가 폴 모리아(Paul Mauriat)의 미뉴엣(Minuetto)을 샘플링하여 곡의 주 멜로디를 만들었고, 첫 부분은 읊조리듯 그러나 리드미컬하게 속삭이는 가수의 랩으로 시작된다. 그에 대답하는 듯한 남자 성악가의 목소리가 이어져 나오고, 그다음 파트에 가서야 ‘너무나 미안해요’ 라며 여자 가수의 노래가 시작된다. 그날 이후 나는 이 곡을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다. 클래식을 샘플링하여 넣었고, 페이지는 프로젝트 그룹이고, 이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 마로니에 출신이라는 것 등등은 그 당시에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그저 멜로디에 꽂히고 가사에 감동받아 반복 재생했을 뿐이다.
처음엔 멜로디에 집중해서 노래를 듣다가 어느 순간 가사를 자세히 듣게 된 나는, 다시 한번 이게 뭐지? 하는 생각으로 가사 내용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저 노래가 좋아 나에게 건넨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싸하다.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노래의 내용은 이렇다. 너로 인해 힘들 때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있고 이젠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날 용서해달라고, 좋은 사람 만나라고. 노래가 좋은 건 알겠으나 왜 굳이 이런 시기에 나한테 이런 곡을 들어보라고 했을까.
그는 대학 OT(Orientation) 때 처음 만난 같은 과 선배였다. 그러니까 대학에 입학도 하기 전에 나를 설레게 하여 앞으로 다가 올 대학 생활을 핑크빛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해 준 장본인이기도 했고, 혹시라도 나에게 이성으로 다가올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어쩌면 한 명도 없었을 수도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뭐 상상쯤은 뭔들.) 모든 남자사람들을 미리부터 차단해버리게 해 준 안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보통 남자들에 비해 조금 긴 머리, 우수에 젖은 큰 눈, 낮은 목소리,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빨간 뿔테 안경까지. 여자치고 큰 편인 나에 비한다면 남자 치고 큰 키가 아니라는 것 빼고는 단점이 없어 보였다. 이런 걸 바로 콩깍지가 씌었다고 한다지. 그 콩깍지라는 것이 인생 사는데 큰 도움이 될 것 없고, 한편으로는 후회스러운 과거를 남기는 데에 큰 몫을 한다는 걸 지금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때 난 그 이름도 상큼한 새내기가 아니었던가. 그냥 모든 게 다 새롭고 좋을 때였을 것이다. 그런 인생의 쓴맛을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이리 써놓고 보니 참 부끄럽지만 굳이 인정을 해보자면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렇게나 되고 싶었던 대학생이 되었고, 비록 아직 법적으로는 성인이 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어른이라 불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대학생활과 더불어 꿈꾸었던 캠퍼스 커플이 되는 것 역시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 같은 이 상황이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다행히 같은 과였으므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과에서 하는 행사에는 무조건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어렵지 않게 몇 번 술자리를 같이 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저 없이 그에게로 갔다. 먼저 마음을 준 것은 나이지만, 나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분명 그쪽이었다.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가만히 있어도 수많은 즐거운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과 달랐다. 스스로 최대한 바쁘게 움직여야 그나마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거리 몇을 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건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므로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찰떡같이 붙어 다니는 캠퍼스 커플이 되지는 못했다.
군대를 아직 다녀오지 않은 남자 대학생은 대부분 아직 철이 없다. 수능을 보는 순간부터 군대에 입대하는 그날까지의 시간을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자유와 방탕의 시간으로 인식하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나태하게 보낸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열심히 사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 주변의 선배, 동기, 후배, 친인척 등 많은 이들이 그러했다. 이번 학기까지만 다닌 후 군대에 갈 예정이었던 그 사람은 대부분의 낮 시간을 당구장에서 보냈고, 그 나머지 시간을 술집을 전전하는 데에 썼으며, 집에는 최대한 안 들어갔다.
나 역시 여기저기 동아리방을 기웃거리고, 술 사준다고 하는 선배가 있으면 득달같이 따라다녔으며, 동기들과 우정을 쌓기 위해서도 시간을 보내야 했다. 딸이 성인이 되었고, 이젠 좀 귀가가 늦어질 수도 있고, 술도 조금씩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던 아빠로 하여금 통금시간이 정해지는 바람에,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집까지 미친 듯이 뛰어가는 수고도 아끼지 않아야 했다.
그래도 그와 무탈하게 잘 지냈다고 생각했다.
공강 시간이 맞으면 되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고, 학교 앞에서 각자의 술자리에 있다가도 집에 가기 전엔 만나서 함께 버스정류장까지 걷기도 했다. 싸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몇 번의 지각에 대한 벌로 통금시간이 더 당겨진 나는 평소보다 일찍 그와 헤어져 집으로 갔고, 그를 포함해 함께 남겨진 몇몇은이 시간에 집에 가기 아쉽다며 술집으로 향했다. 다 늦게 그에게 전화가 왔다. 어쩐지 전화를 받기가 싫더라니, 아니나 다를까 약간 술에 취한 듯한,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좋아져 버렸다고.
내 인생을 통틀어 남자 때문에 밤새워 운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냥 네가 싫어졌어,라고 말했다면 좀 덜 슬펐을까? 아마 그땐 그 역시 납득할 수 없었겠지.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였을 수도 있고,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는 생각에서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억울해서였을 수도 있고, 창피해 서였을 수도 있다.
지옥 같은 며칠을 보내고 정신 차려보니 기말고사 기간이 코앞이었다. 고맙게도 대학은 각 과목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 종강 날이었고, 그즈음에는 수업도 잘 없다. 우연히 라도 그와 학교에서 마주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으므로 그럭저럭 마음을 추스르고 시험 준비에 전념했고, 그렇게 여름 방학은 시작되었다.
그의 전화를 받은 후 방학이 시작되기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번 더 그에게 연락이 왔고 주로 내용은 본인의 취중진담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었다. 같이 있다가도 통금시간 때문에 일찍 집에 가버리는 나 때문에, 금요일을 포함한 주말이면 봉사활동을 가느라 잘 만나지 못하는 나 때문에 외로웠기 때문이고, 그때 옆에 있던 그녀에게 일순간 마음이 끌렸으나 사실 너에 대한 내 마음이 훨씬 크다, 뭐 이런 식이었다.
그런 말에 덥석 없던 일로 쳐주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제까지 사랑하던 사람을 오늘부터 갑자기 미워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방학이 시작한 후에도 그에게 연락이 왔고 결국 우린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인정하겠다. 인간관계에서만큼은 전혀 쿨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미련 많은 이 성격. 청승이다.
방학 기간에는 학교에 갈 필요가 없으므로 우리가 주로 만난 곳은, 내가 사는 곳보다 상대적으로 대도시인 그가 사는 도시였다. 매일 만나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오히려 학기 중엔 잘하지 못하던 찰떡 커플 흉내를 내면서 달달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는데...... 하필 나에게 건넨 노래가 미안해요? 어쩌면 내가 괜히 예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인은 해봐야겠다 싶었다.
이제는 우리 기억 속에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파란 화면의 PC통신을 아시는지. 학교마다 소통의 공간을 위하여 하나의 통신사를 정해 그곳에 지금의 홈페이지 같은 공간을 만들고, 수강신청 시스템도 갖추고 했었는데, 우리 학교는 그것이 나우누리였다. 천리안, 하이텔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졌으나 사용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 파란 세계에 들어가 우리는 참 많은 일들을 했다. 그중 하나가 상대에게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는데, 현재 상대도 접속 중에 있으면 바로 메시지를 읽고 답장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 다음 접속 시에 본인에게 온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그 히스토리도 볼 수 있었고.
그 좋은 노래를 한참 듣다 갑자기 기분이 싸해진 나는 얼른 PC통신에 접속했다. 전화선을 끌어다 써야 했으므로, 내가 통신을 하는 동안엔 일반 전화의 수발신이 불가했고, 그런 이유로 되도록이면 늦은 밤에 접속하는 것이 가족들과의 무언의 약속이지만 지금은 급했다.
띠~띠띠~하는 요란한 접속음이 울리고 드디어 로그인 화면, 나는 접속을 했다. 그의 아이디로. 어쩌다가 그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알고 있었고, 대부분은 알아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좀 도용이 필요했다. 뭐 잡아가려면 잡아가든지.
그에게 취중진담 전화를 받을 때와 비슷한 무게의 돌덩이가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철렁하다고들 표현하지. 그를 잠시 흔들리게 했다던 그녀에게 보낸 메시지가 몇 개 있는 것이었다. 내용은 심상한 안부 인사였지만, 나랑 한참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 할 일은 아니지.
이후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곳에 다 적으려면 그 사연이 하도 구구절절하여 이쯤에서 끝내겠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런 시련들을 다 극복하고 우리는 진짜 연인이 되어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결국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 헤어지고 말았다.
그는 군대에 다녀온 이후 학교에 복학했고, 원래대로라면 졸업을 했어야 하는 나도 1년간 휴학을 했던 연유로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미리 보였다면 피했을 테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날에는, 나는 그의 친구인 나의 선배들과, 그는 나의 친구인 그의 후배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도, 서로는 극구 눈을 피하며 그 난처한 순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나쳐갔다.
어느 날 같은 과 후배와 커플이 되었다는 소식을 돌고 돌아 들었고(우리 둘이 CC였다는 건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웬만하면 내 앞에서 그에 대한 얘기를 잘 안 한다.), 둘 다 졸업 후 우연히 함께 하게 된 과모임에서 우리는 몇 년 만에 처음 다시 만났다. 우리 둘 다 상대가 올 거라는 생각을 못한 채로 참석을 했었던 것 같다. 처음엔 되도록 서로가 안 보이는 자리에서, 되도록 눈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을 무렵 그가 소주병과 잔을 들고 내 옆으로 왔다. 오랜만에 같이 한잔 하자며. 웃으면서 울면서 그 시간을 보낸 기억이 난다. 그와도 친하게 지내던 내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OO이는 좋은 사람 만나 잘 지내고 있는데 선배는 왜 이러고 있느냐고. 그래서 마음을 추스르고 보니 곁에 있는 이가 눈에 보였고 예쁘게 잘 만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를 축복해 주었고, 그도 나도 그때 만나던 이와 결혼해 잘 살고 있다.
긴 시간이 흘렀으나 나는 여전히 페이지의 ‘미안해요’를 들을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
세 장의 디스켓, PC통신, 무더운 여름날 강변에 나란히 앉아 바라보던 잔잔한 풍경, 수없이 주고받은 편지, 기차를 타고 가서 만난 동해바다의 푸른 파도,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그에게 기대는 나를 편히 해주고자 어깨 높이를 맞춰주던 그의 따뜻한 배려, 헤어지기 싫어서 그가 나를 데려다주고 내가 다시 그를 데려다 주기를 반복하던 시간들. 아팠던 기억들은 다 사라지고 이렇게 좋은 기억들만 노래에 담겨, 그때를 떠올리며 미소 짓게 한다.
아참, 얼마 전 꼭꼭 숨겨두었던 그 시절 일기장을 보다가 굉장히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땐 그게 현실이라 잘 깨닫지 못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멀리서 바라보니 보이는 게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던 건 그 여름 방학 이후였다는 것. 착각 속에서 무려 반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던 어리고 어리석은 나의 그 시절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편 깜찍하기도 하다. 뭐 추억이 반드시 아름답기만 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흑역사로, 그 또한 나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다. 결국 ‘좋았던’ 추억으로 남으면 그걸로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