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만 해도 투자 목적으로서의 부동산은 아파트보다 주택이 좀 더 가치 있게 여겨질 때였다. 아빠는 오랫동안 근무했던 군대에서 제대를 하셨고, 다음 직장은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 수도권에서 구하자는 생각이 있으셨다. 우리 가족은 오랜 지방 생활을 마무리하고 N시로 올라왔고, 첫 번째로 들어갔던 전셋집에서 6개월 만에 나와야 했다. 주인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는 이유였다. 그동안은 대부분 군대에서 제공하는 관사에서 살아왔던 터라 타의에 의해 이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모님은 꽤 불편하게 여겨지셨었나 보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빠는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아파트를 구입하셨는데, 그로부터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주택을 매입하셨다. 목적은 재산증식이었다.
아파트는 큰돈을 그저 깔고 앉아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조금만 더 보태 상가 딸린 주택을 매입하면 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은 아직 아파트가 재개발로 인한 가치 상승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기 전이었고, 번듯한 주택을 한 채 갖고 있다는 것은 가정경제를 어느 정도 궤도 위에 올려놓은 가장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아빠 스스로도, 그런 아빠를 가장으로 둔 우리 가족도, 큰 집으로 이사를 한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부모님께 받은 것 하나 없이 혼자 힘으로 자수성가하신 아빠로서는 이제야 드디어 무언가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 굉장히 뿌듯하셨을 것이다.
이사 가기 한 달 전부터 우리는 조금씩 짐을 싸기 시작했다. 포장이사업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비용도 비쌌고, 군인이라는 아빠의 직업 때문에 이사에는 이력이 나 있었던 터라 포장이사업체를 부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어디에선가 이삿짐을 싸기에 적당한 크기의 박스를 잔뜩 구해다 베란다에 쌓아두신 아빠는, 하루에 한 박스씩 자주 쓰지 않는 물건들부터 포장하기 시작하셨고, 새로 구입할 예정이라 미리 처분한 소파가 있던 자리에 차곡차곡 쌓아 두셨다.
그런 일을 하실 때마다 도우미는 대부분 나였다. 아직은 한가한 초등학생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그런 이유랑은 상관없이 아빠는 일을 하실 때 나를 곁에 두는 것을 좋아하셨다. 뭐 가져와라, 이것 좀 잡아봐라 등등 잔심부름을 시켜가면서. 물론 힘쓰는 일이 필요할 때는 중학생 오빠가 불려 나왔지만, 소소한 심부름은 대부분은 내 몫이었다. 나 역시 그런 식으로 아빠와 붙어 앉아 꽁냥 거리는 것을 좋아했고, 우리는 점점 늘어가는 이사 박스의 개수를 세어가며 즐거워했다. 그것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무렵, 드디어 우리의 이삿날이 되었다.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도 굉장히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하고 번듯한 건물의 외관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무척 ‘있어’ 보였다. 요즘 사람들은 차를 고를 때 승차감과 더불어, 어쩌면 그보다 더 고려하는 것이 하차감이라던데, 그때 그 집은 나에게 ‘출입감’ 을 주는 집이었다. 어감은 좀 우습지만, 뜻은 말 그대로다. 집을 드나들 때마다 나름의 부심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사를 간 후로 아빠는 늘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비록 갚아야 할 빚이 생겼고, 멀쩡한 외관과 달리 비만 오면 창틈으로 물이 새는 등의 하자가 집안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지만, 그런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빚이야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열심히 모아서 갚으면 되고, 하자는 고치면 그만이니까. 1층 자투리 땅에는 멋진 장독대를 만들었고, 옥상엔 커다란 평상을 가져다 놓으셨다. 우리 집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사를 간 후 얼마지 않아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고, 아마도 그 무렵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전축 앞에 앉아서 어떤 노래를 무한반복으로 들으시며 신나게 따라 부르고 계시는 아빠를 본 것은. 늘 그랬듯 난닝구(우리 어릴 때 쓰던 발음대로 적어본다. 지금은 일제의 잔재라 잘 안 씀)에 반바지 차림이었고, 손에는 가사를 적은 것으로 보이는 종이 한 장을 들고 계셨다. 나는 아마도 어딜 잠시 나갔다 들어오는 중이었던 것 같다. 나를 보더니 반갑게 손짓을 하며 옆에 불러 앉히신 아빠는, 내가 잘 볼 수 있게 가사가 적힌 종이를 내 쪽으로 내미셨다. 같이 따라 부르자구요? 갑자기?
사실 우리 가족 중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은 1도 없다.
아빠는 박치, 엄마는 음치, 오빠랑 나는 그럭저럭 음정 박자는 맞추지만 목청이 좋지 않아 고음처리가 잘 안 된다. 그나마도 엄마 아빠에 비해서는 일취월장했다 자부하는 나도, 실은 노래방에서 갈고닦은 실력일 뿐 노래 잘하는 유전자는 물려받은 바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빠로부터 나에게까지 전달된 노래에 관한 특성이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따라 부르는 것을 참 좋아한다는 것이다. 늘 노래를 흥얼거리시는 아빠를 닮았는지, 나도 야자시간에 무심코 노래를 흥얼거리다 친구들한테 타박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깜짝이야. 귀신 나오는 줄 알았잖아! 난 쿡쿡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옆 사람이 지 혼자 이어폰 꼽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정작 자신의 입에선 어떤 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모르고 그저 신나 있는 모습, 한 번쯤은 본 적들 있으실 것이다.
고1 때 쓴 일기장 맨 뒷 페이지에 친구들이 몇 글자씩 끄적여 준 글들이 남아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도 적혀있다. “지금처럼 노래를 함부로 불러 옆 사람 놀래 키는 일이 없길 정말 난 바란다. - 소연” 오랜만에 일기장을 들춰보다 발견한 그 글을 보며, 곱슬머리에 가무잡잡한 피부색을 가졌던,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이 개구졌던, 귀여운 짝꿍 생각을 하며, 지버릇 개 못주고 늘 그러고 살았던 내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는 내 자리와 한참 떨어진 곳에 앉은 언니도 나에게 와서 슬쩍 말해주곤 했다. 너 노래 흥얼거리는 소리 내 자리까지 다 들려. 그럼 내 자리부터 언니 자리 사이에 앉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듣고 있었을 텐데. 묵묵히 감내해준 동료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아빠가 듣고 계시던 노래는 이미영의 ‘지금은 늦었어’라는 곡이었다.
둥둥 둥~ 둥둥둥둥 둥~ 하는 기계음으로 시작하는 전주부터 심상치 않더니, 가수의 목소리 또한 청아하기 이를 데 없어, 듣자마자 빨려 들어가게 되는 중독성 짙은 곡이었다. 카세트테이프는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모르겠으나 가사가 궁금했던 아빠는 반복 재생을 하면서 가사를 받아 적고 계셨고, 그러던 중 나를 발견하신 것이다. 반가운 손짓은 너도 와서 좀 들어보고 나를 도와라, 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가사는 복잡하지 않았고, 한 음절 한 음절 꾹꾹 눌러가며 불러주시는 덕에 알아듣기도 쉬워 우리는 금세 받아 적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신나게 따라 부르기!
사실 아빠의 최애 가수는 이미자와 주현미였다. 평소에는 이 두 가수의 노래를 즐겨 들으셨고, 보조개 미소를 지으며 노래하는 주현미가 TV에 나올 때면 눈을 떼지 못하셨다. 엄마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조용필과 나훈아는 멀리 하셨고(그 와중에 질투?), 그들이 나올 때마다 되도 않는 흠을 잡아 한 마디씩 하곤 하셨다. 아무튼 이제까지 아빠의 노래 취향과는 사뭇 다른 노래에 꽂혀 열심히 따라 부르시는 아빠가 신기하기도 하고, 더운 여름날의 늦은 오후 아빠와 함께 들었던 그 멜로디가 귓가에 남아, 나는 그 이후로도 이 노래가 들려오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빠 생각이 나서.
아빠는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바로 아빠가 그리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던 그 3층짜리 주택에 살 때였다. 평범한 주택에 엘리베이터가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몸이 불편한 아빠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것은 엄마에게 너무나 힘든 일이었고, 가까운 시일 내에 완치되실 거란 희망도 없을 때였으므로 엄마는 할 수 없이 그 집을 처분하기로 마음먹으셨다. 엄마 아빠의 영혼을 갈아 넣은 그 집을 급하게 처분하느라 시세보다 낮게 내놓아야 했고, 그런 결정을 해야만 하는 엄마도 굉장히 속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아빠의 전축이 우리 가족의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은. 한때는 그것이 각 가정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자 사치품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 LP 재생 기능까지 두루 갖춘, 마치 좌청룡 우백호나 되는 듯 양쪽에 당당히 자리한 엄청난 크기의 스피커까지 포함된 전축, 좀 세련되게 말해서 홈시어터(정확히 하자면 구성이나 의미가 조금 다른 녀석들이지만 가정에서의 쓰임은 대략 비슷했다.). 어느 순간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그것들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없어지기 시작했고, 기능은 향상되었으나 사이즈는 확 줄어든 미니 컴포넌트를 거쳐, 지금은 한 손에 들어올 정도의 블루투스 스피커 하나면 충분한 시대가 되었다. 물론 아빠의 전축이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어 처분되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랜 주택생활을 마치고 상대적으로 평수가 작은 아파트로 옮기느라 했던 불가피한 선택일 뿐.
아빠는 쓰러지신 후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비교적 무탈하게 15년을 넘게 사셨다. 아직 어렸던 유년기를 빼고 계산을 해 본다면, 건강한 아빠를 본 기억보다 아픈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이 훨씬 길고 선명하다. 성적관리와 가정교육은 대부분 아빠가 담당하셨으므로 이래저래 야단맞은 적도 많고, 초등학교 시절엔 마치 군대생활을 하는 것처럼 기합을 받기도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내 기억 속엔 화나 있는 아빠의 얼굴은 없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괜히 옆에 있는 사람을 발가락으로 꼬집어서 아프게 하고는 장난스레 웃고 계신 모습, 입에는 담배를 꼬나물고(아빠한테 쓰기엔 좀 도전적인 단어인 듯싶지만, 담배에 대해 묘사할 땐 이 표현이 어쩐지 적당하다.) 톱질하고 못질하여 뚝딱 무언가를 만들어 내시던 모습, 여름이면 옥상에 있는 평상에 앉아 함께 수박을 먹던 모습, 추운 겨울 택시를 잡으려고 기다릴 때 품 안에 나를 넣고 감싸주시던 모습(왜 아빠는 이렇게 따뜻하냐고 물으니 내복까지 든든하게 입어서라고 하신다. 그런데 지금 남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꼭 내복 덕만은 아닌 것 같다. 아빠라는 존재는 원래 따뜻하다.), 그리고 함께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던 모습.
이 글을 쓰느라 오랜만에 이미영의 ‘지금은 늦었어’를 찾아들어봤다.(Youtube의 힘이란!) 역시나 좋다. 그리고 역시나 아빠와의 ‘그 날’ 이 떠오른다. 나에게는 가사의 애절함과는 상관없이 매력적인 멜로디와 어릴 적 어느 날의 추억으로 기억되는 이 곡이, 많은 이들에게는 아프게 이별했던 옛사랑의 기억과 더불어 떠오르는 곡인가 보다. 그런 경험에 대해 적은 댓글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지금은 잘 살고 있느냐고, 닿지 못할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 노래를 들을 당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면 적어도 40대 후반에서 50대는 되었을 텐데.
사랑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굳이 다시 만나보겠다는 의지 같은 건 전혀 없더라도, 그저 안부가 궁금하고 어느 하늘 아래서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소망 같은 것.
가수 이미영은 1988년 KBS 대학가요축제에서 ‘알 수 없는 슬픔’으로 금상을 수상했다. ‘지금은 늦었어’는 1집에 수록된 곡이고, 2집까지 발매한 후 가수 활동을 접었으나 이후로도 노래는 계속 해오셨나 보다. 찾아보니 최근 영상도 있고 얼마 전 발매한 음반 소식도 있었다. 역시! 노래 잘하는 축복을 갖고 태어난 분들은 꼭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노래와 연관된 일을 하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이 아무 노력 없이 생긴 대로만 부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시작이 우리 같은 평민들과는 다른 그들의 유전자가 부럽다. 그렇다고 그런 걸 물려주지 못한 아빠를 탓하는 건 아니다. 아빠에게도 없는 것이었을 테니.
어딘가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들려오면 흥에 겨워 따라 부르는 아빠의 습관은 아프시게 된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 이 노래를 들려드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든다. 아빠 이 노래 기억나요? 나랑 열심히 따라 불렀던 노래. 나는 이 노래 들을 때마다 아빠 생각이 나요, 라고 말할걸 그랬다.
P.S.
아빠를 생각하며 조금은 침울한 마음으로 영상을 보고 댓글을 읽다가 빵 터져 버렸다.
보석 같은 목소리의 가수인데 활동은 안 하시니 슬프네요.
이미영 씨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또 슬퍼져요.
신께선 왜 저한텐 돼지 같은 목소리만 주셨을까.....
한번 만나서 위로해 드리고 싶다. 그대에게만 주신건 아닐 거라고. 우리 같이 열심히, 신나게 따라 부르며 연습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