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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리스러브 이유미 Jul 26. 2022

막상 써보니 별거 아니네.

별거인지 아닌지 해 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글을 쓰고 싶은데 막상 쓰려면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글쓰기 수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글을 잘 못 써요. ", "쓸 소재가 없어요."라고. 더 자세히 들어보면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누가 읽어줄까요?", "어디까지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짜 속마음은 말하기가 어려워요."라는 고민이다. 글쓰기, 특히 에세이는 자신의 경험과 그 안에서 느낀  쓸 수 있는 글을  때 나와 타인이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실수담은 부끄럽고, 상처받은 이야기는 말만 꺼내도 아프고, 화가 났던 일은 겨우 이런 일로 화를 내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 쓰기가 어렵다. 이렇게 저렇게 다 빼고 쓰다 보면 껍데기만 있는 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 되어버린다.


지난주글쓰기 테라피 강의를 했다. 도서관에서 진행한   강의여서인지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독서도 많이 하고 글쓰기에 관심 많았다. 우리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주제는 없었다. 단 조건을 달았다.  


10분 동안만 쓸 것.

절대 멈추지 말 것.

떠오르는 그대로 쓸 것.

평생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쓸 것.

물론 우리끼리도 공개하지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참여자들은 안심하는 듯했다. 10분 동안 우리는 함께 있지만 모두가 혼자 인 것처럼 몰입했다.  이 조금씩 흔들릴 뿐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앞에서 두 번째 줄까지 스위치를 내려 어두웠고, 피아노 연주 음악이 집중하면 무시될 만큼의 볼륨으로 흘렀다. 머릿속을 날아다니는 어떤 단어 또는 문장들을 예리하게 잡아채 꺼내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이제 30초 후에 마무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몰입을 깨는 게 미안했다.


펜이 멈추고 다시 시선이 내게로 왔다. 순간 는 내가 말한 조건을 어겼다.


" 절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을 글을 쓰라고 했지만... 그래도 읽어봐 주실 분이 있으실까요?"


누군가 손을 들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은밀한 이야기를 자신의 목소리도 읽는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게 더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래도 잠깐의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기적을 바라며.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누군가는 봐주기를 바라는 강한 욕망도 함께 있음을 알기에. 


"제가 읽어볼게요."


한 분이 작지만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심장이 더 떨렸다. 세상에. 이런 용기가 있다니. 사람 마음을 너무 얕잡아 봤다. 잠깐의 반성과 지지의 눈빛을 보내며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담담하게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상처는 그녀의 청년 방황설득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 긴 시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느꼈을 죄책감,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니 같이 아팠다.


글이 끝박수소리가 고요함을 깰 때까지 우리는 그 글이 이끄는 시간에 함께 있었다. 처음 만났지만 글로 깊이 알아가는 사이는 글쓰기 친구만이 느끼는 특혜다. 그녀는 새벽 5시일어나 긍정 확언을 쓰고, 108배 절을 하고, 아티스트 웨이 쓰기를 3달째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막히는 부분이 있어 답답했다고. 사실 이 상처의 부분은 생각하기도 싫어서 글로 쓰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막히는 이 일을 한 번은 용기 내어 꺼내고 싶었다고.


"정말 많이 떨리고 힘들었는데 막상 해보니 별거 아니네요. 강사님이 자신의 글을 담담히 쓴 글을 읽어주는 걸 보면서 용기 낼 수 있었어요. 이 일을 더 자세히 써봐야겠어요." 대단한 용기였다.


" 맞아요. 별거 아니에요.  그런데 진짜 쓰고 말해 본 사람만 별거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요." 나는 존경을 담아 말했다.



사건이 별거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아물지 않은 채 굳어버린 상처는 돌덩이 같은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그 무게만큼이나 말이나 글로 꺼내는 것도, 그 상황을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은 별거인 일이다. 그런데 막상 글로 쓰고 공개해 보면 예상치 못 한 많은 감정을 경험한다. 내 슬픔을 나와 타인이 알아주고 공감받을 때 느끼는 안도감. 후련함. 기특함. 존중감. 성취감.  벅차오름 같은. 그렇게 마음을 툭툭 털어버리면 "에이 별거 아니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마치 아장아장 걷다 넘어져울까 말까 망설이는데 "괜찮아. 별일 아니야. 일어나."라는 부모의 말에 벌떡 일어나 손을 툭툭 털며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는 어린아이처럼.



「그냥 살아만 있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딸의 청소년 우울증과 나의 우울증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서 느낀 수많은 갈등의 순간이 떠올랐다. 초고를 쓰며 울고, 이렇게 까지 써야 하나 망설이고, 고치면서 그 상황과 감정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미치게 싫었다. 울면서 쓰다 한 꼭지를 마치면 실신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쓰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나의 상처를 혼자서 해결해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 결국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 달라고 울부짖으며 나를 점점 더 괴롭혔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가 알게 될 때 나는 어떤 상태가 될 상처받는 건 아닐지 두려운 마음과 끊임없이 싸웠다. 결국  갇혀있던 괴로움이 승리하고 모두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시간을 지난 지금  '막상 해보니 별거 아니네. 왜 이걸 이렇게 힘들어했지?' 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마음속에 쌓인 감정들은 서로 엉키고 단단해지면서 감정들을 마비시킨다. 그러면 내 마음을 챙기고 싶어도 스스로도 어떤 마음인지 알아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 단단한 마음은 결코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 관계의 문제, 신체의 통증 같은 모습으로 존재를 계속 증명한다. 아우성이 들리는가.


자신을 알아달라는 외침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짜 상처받은 마음이 얼굴을 내밀 때까지 쓰고 또 쓰면 좋겠다. 이 마음이 맞냐고 글로 끊임없이 질문하면 좋겠다. 진솔하게 바라보고 글을 쓰는 일은 이미 충분히 힘들었을 마음의 말을 온몸으로 경청하는 일이다. 애썼다고, 힘들었겠다고, 그럴 수 있다고 안아주며 다정하게 돌보는 일이다. 그 시간은 길고 지루할 수 있지만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다.


내가 쓰는 용기 있는 글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쓰는 용기를 준다. 내가 써야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우리는 함께 애도할 수 있다. 그리고 너도 아팠겠다고. 잘 견뎌왔다고 안아줄 수 있다. 그렇게 나를 돌보고, 타인을 돌볼 수 있다. 글쓰기 테라피는 글로 슬픈 마음을 떠나보내는 게 아니다. 잘 정돈해서 적당한 때에 꺼내 쓸 수 있도록 제자리에 잘 넣어두는 일이다. 


이제 쓸 용기가 생겼는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글을 쓰는데 그렇게 비장한 각오가 필요한 일은 아니다. 일단 페이지를 열어보자. 그리고 늘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그 이야기.  별거인 것 같은 그 일을의 시작을 시작해보자. 일단 첫 줄을 썻다면 성공이다. 그 다음은 글이 나를 끌고간다. 다 썻다면 다른 사람에게 읽어주거나  발행해보자.  분명 긴장해서 내뱉기도 힘들던 숨 빵빵해진 풍선 바람 빠지듯 슈~~~ 웅 빠져나갈테니까. 그리고 당신은 말할테지. 


'에잇, 별거 아니네.' 


별거 인지 아닌지 해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당신이 웃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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