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잉오렌지 Apr 11. 2024

가장 행복했던 날 나는 2천만원을 날렸다

나는 미신을 잘 믿지 않는 편이지만 강박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미신이 하나 있다.


인생사 새옹지마,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


여기서 나아가서, 나는 이 속담을 이렇게 해석한다.




행운은 소비의 개념이다.




나의 행운의 양은 태어나서 어떠한 창고에 보관되어.. 죽을 때까지 일정량을 하루하루 소비한다. 총량 100, 수명이 100이라고 치면.. 행운을 전부 끌어모아서 어렸을 때 100을 다 써버리면, 나중엔 창고에 보관해놓은 없어 운을 끌어오지도 못하는 불행한 채로 노년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즉 적당히 '쉬어가는 때'가 있어야 하고.. 나는 이를 액땜이라고 불렀다.



요약하면 운이 나쁜 날은 그날 내가 창고에 비축된 행운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셈이고.. 따라서 내 미래에는 운이 좋은 날이 다가올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나는 액땜을 강박적으로 믿고, 운이 나쁜 날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오늘 음식을 엎지르고 이어폰이 고장나고 돈을 잃어버렸으니까, 내일은 잃어버린 것만큼의 큰 행복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런 나의 미신을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합리화.




나는 나만의 재능인 능숙한 합리화를 통해서, 불행과 행운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불행 다음에 행운이 오고, 행운 다음에 불행이 온다면, 결국 행운과 불행의 차이는 거의 없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불행감을 느낄 땐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 기분이 조금 좋아지고,


행복감을 느낄 땐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조금 우울해진다.



그런 괴악하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나는 계속 타고 있다. 



나의 감정을 죽게 만드는 단 하나의 감정적인 미신을, 나는 여전히 신봉한다.




미신이라는 게 그렇듯이 과학과는 멀리 떨어져있고, 대부분은 그냥 인간 특유의 몽상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 위주로 필터링해서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본능 프로세스로 짜여있다. 심지어 나는 전공인 심리학을 통해서 미신의 원리를 배운 적도 있다.


그래도 난 미신을 믿는다. 믿는 쪽이 마음이 편하니까. 


미신이 비과학적이니까 믿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쪽은, 미신을 믿는 것에서부터 얻는 강력한 즐거움의 감정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다.




나는 역대급으로 개같았던 면접을 보고 기운이 빠져 있던 때, 그 면접을 본 직후에 뜬금없이 헤드헌터에게서 원하던 직무의 포지션 제안을 받았다.


나는 꿈에 그리던 전공에 합격하고, 그 다음주에 보이스피싱에 당해 2천만원을 잃었다.


대학 합격 전화를 기다리느라 내 폰에 걸려오는 모든 전화에 대해 예민해져 있었던 상태에 어이없게도 보이스피싱에 그대로 당해 2천만원을 범죄자에게 갖다바쳤고 아버지에게 욕이란 욕은 다 쳐먹었다(그 2천만원은 내 돈이 아니라 아버지 돈이었다. 난 죽어 마땅한 딸이다). 보이스피싱, 당해봐야 그 심각성을 깨닫는다. 나도 직접 당하기 전에는 보이스피싱으로 700만원을 잃어버린 친구를 속으로 비웃었었다.



모든 행운에는 대가가 치른다. 공짜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대가를 치른만큼 반드시 행운이 찾아온다. 언젠가.


설령 내가 믿는 미신이 개소리라서 이 세상 어딘가에는 대가 없이 무한한 행운을 즐기고 있는 타고난 행운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이 개소리 덕분에 나의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내가 운이 없는 건, 행운을 미리 끌어모아 써버린 나의 잘못이기 때문에. 



그런 개소리를 마음속 지지대로 삼고 하루하루를 평온하게 살아간다.


또다른 잿빛이 내 가슴속에 기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