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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Apr 24. 2024

언제나 우울한 나는 우울에 조금 둔했다

왜냐하면 그건 일상이니까

우울증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쉽게 말하면 우울하다. 이상하게, 지나치리만큼. 그냥 눈물이 막 쏟아지고, 절망스럽고, 죽고 싶다. 그런 게 며칠몇날이 반복된다. 



하지만 나는, 거의 다섯 살때부터 어중간하게 우울했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우울이라는 감정에 대해 직관적으로 깨닫지 못한다. 가끔 가다 아무 이유 없이 처지기도 하고, 유튜브 영상을 보다 갑자기 생각에 빠져 1시간 동안 영상을 멈추고 생각에 빠져 있을 때도 있었다. 문득 가까운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생각에 항상 사로잡히기도 하며, 먹을 것을 바닥에 떨어뜨려서 갑자기 눈물까지 흘리며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겐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몇시간 내내 눈물을 짜낸 적은 있다. 버스 안에서. 그때는 내가 정말 힘들었을 때였고, 자퇴를 결심했을 때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때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였고, 그래서 망설임없이 자퇴라는 거대한 도전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땐 죽고 싶다는 생각은 그리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다. 내가 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처음으로 부모님께 감정을 쏟아내며 반항을 해보았을 때, 그리고 완벽한 허락은 아니지만 일단 시도는 해보라는 뉘앙스의 대답을 듣고, 나는 날아갈 정도로 기뻤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바뀔 때, 그리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뀔 때. 감정선이 움직일 힘이 남아있을 때.

나는 그걸 우울증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그냥 우울한 것이다. 우울할 만한 정상적인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럼 지금의 난? 


난 지금은 그리 슬프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다. 나의 감정선은 무척이나 차분하다. 무슨 사건이 내게 닥쳐도 큰 동요가 없다. 전부 예상 안이다. 변화가 없다.



죽고 싶긴 하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너무 괴로워서가 아니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민폐라고 생각이 들 때, 그리고 미래에도 나 자신이 큰 변화가 없을 것 같다고 느낄 때, 성장하지 못할 거라고 느낄 때, 혹은 성장해봤자 어차피 세상은 나를 알아봐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사로잡힐 때,


그때 사람은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죽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나는 나의 주변 사람이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덜컥 가슴이 내려앉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이유 없이 눈물샘이 자극되곤 했다. 그건 내가 이전에 죽음이라는 경험을 근처에서 학습했기 때문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큰 수술을 했던 것과 친구가 없었던 것 외에는 그렇게 특별한 유년기를 보내지 않았고, 죽음이라는 경험 때문에 데인 상처도 전혀 없었다. 나는 죽음과는 별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면 본능적인 불안과 슬픔이 떠오르게 된다. 눈물까지 글썽일 때도 있다. 심지어 교양 강의 시간에! 어째서일까, 너무 궁금하다. 나는 죽는다는 것 자체를 그렇게 무섭게 생각하지 않는데도.



난 죽음이 불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작과 끝 중에 끝을 담당할 뿐이다.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완수의 개념이니까. 



우리의 인생을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해보자. 이 프로젝트는 완수하기 전에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타인에게 평가되지 않는다. 성공인지 실패인지도 모르고, 우리가 프로젝트를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세상은 전혀 관심이 없다(취업준비생이 실제로는 아무리 재능이 있어봤자 다른 사람들 입장에선 입만 잘났지 취업은 못한 백수로 취급받는 것처럼). 


그러나 프로젝트가 완수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그 프로젝트를 평가하고자 달려든다. 이건 좋았네, 이 부분은 아쉽네, 쓰레기같네.. 다양한 평가들이 나온다. 



하지만 가치가 없는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어떨까?

세상에 나와봤자 명백하게 쓰레기로 평가받을 프로젝트의 경우라면?



더 진행되어봤자 투자비용만 날릴 뿐 성과가 없다면?


혹은 가치가 있긴 있을 것 같은데 도박수에 가깝다면? 


그럼 회사는 그 프로젝트를 '버린다'.




죽음은 이것과 마찬가지다. 죽음이란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기록되기 위한 관문이다.  



그래서 난 죽음을, 축하해야 할 마무리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러나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까지 해온 프로젝트가 아까워서 버리지 않을 수 있다. 버리는 선택지 자체가 두렵다.


혹은 과정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성장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도 아니라면 빠르고, 효율적으로, 버린다. 회사 자원을 더 낭비하지 않기 위해.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지를 선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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